mlbclassic(2017-02-13 20:04:22, Hit : 46, Vote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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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양키스의 무한독주체제를 저지한 명장 Al Lopez




1930년대부터 막강한 팜시스템을 구축한 양키스의 George Weiss는 1947년 단장에 취임한 뒤 Bucky Harris 감독을 경질하고 자신과 친분이 있던 Casey Stengel을 1949년 감독자리에 앉혔다.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양키스의 무한독주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Stengel은 양키스 부임 첫해부터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내며 1960년까지 12년동안 10차례나 팀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켜놓았다. 다시 말해서 Weiss가 단장직에서 물러난 1960년까지 10차례나 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럼, 나머지 2시즌은 왕좌자리를 다른 팀에게 내주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양키스의 독주에 2차례 제동을 걸어던 팀은 1954년의 클리블랜드와 1959년의 화이트삭스였다.

한가지 눈여겨 볼 점은 이 두팀을 이끈 감독이 동일인물
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만으로도 Al Lopez는 쿠퍼스타운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셈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스페인에서 탬파베이에 정착을 했던 Lopez는 포수로 야구인생을 시작하였다. 따뜻한 지역에 거주하다 보니 스프링캠프를 차리는 팀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고, 그중 워싱턴 세너터스도 그가 직접 볼 수 있는 메이저리그 팀이였다.

당시 워싱턴 세너터스에는 30대 후반의 노장투수가 한명 있었다. 바로 'Big Train' Walter Johnson이였다. 세네터스의 젊은 감독 Bucky Harris는 10대의 혈기왕성한 Lopez에게 훈련기간동안 Johnson의 공을 받아 볼 것을 제안하였고, 주급 45$의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전설적인 투수의 강속구를 직접 체험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Lopez는 이때의 추억을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야구인생 중 가장 소중한 것이였다고 늘 강조하였다.


1928년 19세의 어린 나이로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 메이저리그 포수경력 쌓기에 들어갔다. 공수를 겸비한 리그 탑클라스의 포수라고 보기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투수리드와 블러킹, 강한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확하고 빠른 송구만큼은 그 실력을 인정받을 만했다. 다저스 시절 감독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이 좋은 포수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890년대 '볼티모어식 야구'라는 개념을 만들정도로 야구에 새로운 혁신을 몰고왔던 볼티모어의 명포수 Wilbert Robinson이 바로 Lopez를 지도한 감독이였다. 1934년 올스타전 무대를 밟은 그는 7년간의 다저스 생활을 마치고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 된 후로도 꾸준한 경기출장을 하며 커리어를 계속 쌓아나갔고, 이곳에서도 Bill McKechnie, Casey Stengel등의 명장밑에서 좋은 경험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팀인 피츠버그에서도 또 한명의 명장을 계속해서 만나는 행운을 잡게 된다.
1930년대 'Gas House Gang'을 진두지휘했던 Frankie Frisch가 Lopez의 야구철학에 영향을 끼친 여러 스승중 한명이였다.

38세가 되던 1947년, 클리블랜드에서 1년간 몸을 담은 후 19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면서 Lopez가 남긴 기록은 선수생명이 짧다는 포수에겐 뜻깊은 것들이였다. 1년간의 아메리칸 리그(AL)을 제외하고 18년동안 줄곧 내셔널리그(NL)에서 활약하면서 포수마스크를 쓰고 1,861경기에 출장하였고, 클리블랜드 시절까지 합할 경우 통산 1,918경기, 그리고 12차례나 한시즌 +100경기를 포수로 출전하여 꾸준함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철저한 자기관리가 없었더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기록들이였다.

리그 최다출장기록은 1990년 Gary Carter에게, 메이저리그 최다출장기록은 1987년 Bob Boone에게, 한시즌 +100경기 출장최다횟수는 Johnny Bench(13회)에게 경신되기까지 수십년간 그의 이름은 포수출장 부문에서 만큼은 항상 맨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감독으로 평가받기 이전에 선수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은퇴를 하자 선수생활 마지막 팀이였던 클리블랜드는 마이너리그 코치직을 제의하였고, 2년간 감독직을 수행하다가 1951년 Lou Boudreau의 뒤를 이어 클리블랜드의 지휘봉을 맡게 된다. 팀의 지분을 상당량 보유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단장 Hank Greenberg가 Boudreau를 이전부터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Lopez의 내부승진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부임첫해부터 6할의 팀승률 등으로 합격점을 받았고, 3년 연속 팀을 리그 2위에 올려놔 Greengerg 단장의 신뢰는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Bob Lemon, Early Wynn, Mike Garcia의 선발 트리오에 노장 Bob Feller까지 여전히 건재를 과시함으로서 메이저리그 최고의 마운드를 구축한 1954년..

6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하는 양키스를 8경기 차이로 제치고 114승이라는 팀프랜차이즈 최다승으로 정규시즌 우승을 거머쥐었다. 뉴욕자이언츠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Willie Mays의 기막힌 수비에 기가 눌렸는지 시리즈 전적 4패로 허무하게 무릎을 꿇어지만, 이해 클리블랜드의 전력은 메이저리그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가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다.

모든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생각이겠지만, Lopez는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선수를 선호하였다. 제 실력을 믿고 거드름을 피우고나 비성실한 태도를 갖는 선수들에게는 호된 질책을 했던 반면 성적이 저조하더라도 허슬플레이 등 적극적인 태도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에게는 계속해서 기회를 주고 조언을 아까지 않았다.

양키스라는 큰 장애물 때문에 항상 리그 2위에 만족해야 했던 그는 화이트삭스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Greenberg의 부름을 받고 1957년 화이트삭스로 감독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1959년 'Go-Go Sox'의 분위기속에서 1919년 블랙삭스 스캔들이후 40년만에 시카고 팬들을 가을의 축제에 초대하였다. 하지만, 이해에도 월드시리즈 우승은 그를 외면했다. 2승 4패로 다저스에게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다.

양키스의 연속 우승에 다시 한번 제동을 건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양키스는 더욱 강해졌고, 화이트삭스는 조금씩 하향세를 걷기 시작했다. 1969년을 마지막으로 지도자생활을 마치기까지 마지막 2년을 제외하고 매시즌 팀을 5할 승률이상으로 이끌었고, 통산 1410승 1004패의 성적, 선수시절에 쌓아놓은 커리어 등을 높이 평가받아 1977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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