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15 20:38:25, Hit : 73, Vote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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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시리즈 최연소 우승감독 Bucky Harris



(사진출처 : 명예의 전당)


1901년 팀창단 이후 리그 2위가 최고의 시즌일 정도로 워싱턴 세너터스는 리그 최약체 팀으로 20년 넘게 군림(?)했다. 그런 연유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는 Walter Johnson은 통산 65차례의 완봉패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팀의 감독인 Clark Griffith가 1920년 구단주가 되면서 상황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 시카고 Colts(현재 컵스)에서 5년 연속 +20승을 기록한 스타 플레이어였던 Griffith는 10년 가까이 워싱턴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구단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이 직접 팀을 사들여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는데, 그 선수들 가운데에는 Bucky Harris라는 촉망받는 선수도 있었다.

Griffith가 감독시절 데려온 Harris는 방망이로는 그렇게 두각을 드러낸 선수는 아니였지만, 수비에서는 큰 주목을 받은 선수였다. 또한, 그의 지능적인 플레이와 젊은 패기는 Griffith의 마음을 움직인 최고의 장점이였다.

1896년 뉴욕에서 출생한 Harris는 5살이 되던 해에 펜실바니아의 탄광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유년시절 부모의 이혼이라는 불행한 환경을 경험한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13세때부터 탄광에서 광부일을 하면서
그곳에서 운영되던 야구팀 선수로 활약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탄광에서 잔뼈가 굵었던 사람으로서 이 지역 출신의 야구선수이자 당시 디트로이트의 감독이였던 Hughie Jennings와 친분이 있었고,  Jennings는 오프시즌마다 Harris의 훈련을 도와주었다.

메이저리그의 손꼽히는 감독으로 명성을 쌓고 있던 Jenning는 Harris가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기전에도 디트로이트의 훈련캠프로 초청해 빅리그 선수들과 함께 필드에서 야구를 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광산 생활을 청산하고 혼자서 뉴욕으로 돌아간 젊은 Harris는 뉴욕의 세미프로팀에서 유격수와 2루수로 활약하게 되며 시간이 날때마다 Jennigs를 찾아가 보다 높은 수준의 야구기술을 몸소 익히게 된다.

Harris가 메이저리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독립리그의 Buffalo라는 팀에서 활약하고 있을때이다. Clark Griffith가 좋은 선수들을 스카웃하기 위해 우연하게 Buffalo 팀의 경기를 참관하였고, 이 경기에서 Harris는 오른쪽 손가락 골정부상속에서도 더블헤더 2경기에서 8타수 6안타를 휘두르며 Griffith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Grifith는 1919년 5천$에 Harris와 계약했고 자신이 보아왔던 선수중에서 가장 영리한 선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20년부터 팀의 주전 2루수로 발돋음한 그는 타석에서는 평범한 성적이였으나, 수비에서는 5년 연속 리그 최다 병살플레이4차례의 리그 최다 Putout을 기록할 정도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1922년에는 양키스에서 이적한 유격수 Roger Peckinpaugh와 찰떡궁합의 호흡을 펼치며 20세기 초반 시카고 컵스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들인 Johnny Evers - Joe Tinker 이후 메이저리그 최고의 키스톤 콤비라는 찬사를 받았다(Peckinpaugh와 Harris는 1922년 당시 메이저리그 최다인 168개의 병살플레이를 합작했다).

1923년 12월 시골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던 Harris에게 Griffith 구단주로부터 갑작스러운 부름이 있었다.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였다. 그때 Harris의 나이 27세였고, 팀에는 Walter Johnson, Sam Rice 등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있는 상황이였다. 워싱턴의 야구팬들은 Harris를 'Boy Manager'라고 부르며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봤지만, Harris의 지도자 능력은 합격점을 받게 된다.

일단 팀성적으로 자신의 자질을 입증,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정규시즌 우승으로 이끌었다. 또한, 당시 팀에는 Firpo Marberry라는 강속구 투수가 있었는데, 이 선수를 선발이 아닌 구원투수로 적극 활용하였고, 이것이 전문적인 불펜투수의 효시였다.

이전까지는 선발투수와 불펜투수의 개념이 없다고 해도 무방한 상태였으나, Harris는 팀승리를 마무리 할 수 있는 클로져 투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Harris는 1947년 양키스 감독으로 재직중일때도 Joe Page라는 소방수를 따로 두었고, Page는 1949년 당시 메이저리그 최다인 27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팀웍을 가장 강조한 Harris는 감독 첫해에 양키스를 2경기 차이로 따돌리고 팀을 월드시리즈 무대까지 진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의 본인 역할에도 충실하며 뉴욕 자이언츠의 월드시리즈에서 3할 타율, 2홈런, 7타점, 그리고 7차전에서는 수비부문 월드시리즈 한경기 최다 병살플레이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6차전에서는 1 : 0으로 뒤지고 있던 5회말에 역전 2타점 안타로써 'Boy Manager'에서 Boy Wonder'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한편, 이해 월드시리즈는 마운드의 황제로 군림했던 Walter Johnson이 생애 처음으로 밟아보는 월드시리즈 무대라 더욱 관심이 가는 상황이였고, 3루쪽에 박혀있던 돌멩이로 우승의 향방이 바뀐 시리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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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axmlb : ungurs님께서 작성하신 글이며, 일부 편집하였습니다.

1차전에서 Walter Johnson은  2회와 4회 각각 솔로홈런을 얻어맞아 먼저 2실점하고 말았다. 그러나 양키즈를 따돌리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워싱턴의 저력은 만만치 않아서 9회말 유격수 Roger Peckinpaugh의 극적인 안타로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 갔다. 월드시리즈 사상 최초로 벌어진 연장 승부에서 마지막에 웃은 것은 역시 관록의 자이언츠였다.

37세 생일을 불과 2개월 남긴 노장 Johnson의 체력은 12회가 되자 거의 소진되어 버렸고, 결국 안타 2방과 볼넷 2개를 허용하며 2실점하고 말았던 것이다. 시리즈 성적 2승 2패로 양팀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벌어진 5차전.
워싱턴은 다시 한번 Walter Johnson을 선발로 등판시켰다. 그러나 무슨 마(魔)가 끼인 것일까?
믿었던 Johnson은 무려 13안타를 허용하며 6실점을 허용했고, 결국 경기는 6 - 2 자이언츠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5차전에서 28살의 너클볼 투수 Tom Zachary의 호투와 Bucky Harris의 2타점 결승안타로 워싱턴은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10월 10일 벌어진 마지막 7차전은 지금까지 벌어진 어떤 경기보다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은 경기였다. 워싱턴의 감독 Harris는 자이언츠의 강타자 Blii Terry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Terry는 시리즈 6경기에서 홈런 한 개를 포함해 무려 5할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Harris는 그를 몰아내기 위한 계략을 꾸몄다. 정규시즌 특별한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던 23살의 애송이 우완투수 Curly Ogden을 마지막 7차전에 선발 등판시킨 것이다. 자이언츠의 감독 McGraw가 좌타자는 좌완투수에게 약하다는 지론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이른바 위장선발이었는데, Harris는 예상대로 Terry가 라인업에 포함된 것을 확인하자 Ogden에게 단 2타자만을 상대하게 한 후 예정대로 팀의 좌완 에이스인 George Mogridge를 투입했다. Mogridge는 5회까지 자이언츠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았고, 워싱턴은 4회에 터진 Harris의 선제 솔로홈런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4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자이언츠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자이언츠는 6회초 공격에서 워싱턴 수비진의 실책과 안타 2개를 묶어 3득점, 경기를 뒤집었다. 그러나 McGraw 감독은 6회 공격에서 이번 시리즈 동안 폭발적인 타격을 보였던 Terry를 대타로 교체했는데 그것이야말로 Bucky Harris가 바라던 일이었다.

자이언츠가 3 - 1로 앞선 상황에서 맞이한 워싱턴의 8회말 공격. 워싱턴은 안타 2개와 볼넷으로 1사 만루의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Earl McNeely가 직선타구로 아웃되어 2사 만루가 된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선수 겸 감독인 Harris였다. 단타 한방이면 동점. 그러나 긴장한 Harris가 친 타구는 3루수 앞으로 굴러가는 평범한 땅볼이었다. 자이언츠 3루수 Freddie Lindstrom은 여유 있는 자세로 타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Harris의 타구는 그라운드에 숨어있던 돌멩이에 맞고는 불규칙 바운드를 일으켜 Lindstrom의 키를 훌쩍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2타점 적시타. 워싱턴은 돌멩이의 힘으로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9회가 되자 Griffith Stadium에 모인 모든 팬들은 'Walter Johnson!!!" 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Harris는 5차전에서 완투했던 Johnson을 다시 등판시켜도 되는지 걱정스러웠지만. 감독보다 10살이나 더 많은 Johnson은 스스로 등판을 자원했다. 9회초 관중들의 폭발적인 환호 속에 마운드에 올라온 Johnson.
그러나 만 37살에 가까운 나이에 불과 이틀 전 경기에서 완투했던 Johnson이 정상적인 컨디션일리는 만무했다. 그의 구위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그는 관록으로 12회까지 자이언츠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Johnson이 12회초를 마치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덕아웃으로 향하자 관중들은 제발 불길한 숫자인
13회까지 넘어가지 않고 12회말에서 게임이 끝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워싱턴 선두타자 Ralph Miller가 땅볼로 아웃되고 다음 타자 Muddy Ruel이 친 타구조차 포수 머리 위로 뜬 평범한 파울플라이에 그치자 관중들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포수 머리 위로 뜬 타구는 이상한 바람에 휘말린 듯 엉뚱한 방향으로 떨어졌고 자이언츠 포수 Hank Gowdy는 결국 그 공을 놓치고 말았다. 기사회생한 Ruel은 3루 옆을 꿰뚫는 2루타를 때려냈고, 이는 Ruel이 이 시리즈에서 21타수 동안 2번째로 뽑아낸 안타였다. 이제 타석에 Walter Johnson이 들어서자 홈관중석에는 다시금 풍만한 기대가 넘실거렸다. Johnson은 타격에도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격수 땅볼에 그쳤다. 투아웃이 되는가 싶었으나 이번에는 유격수 Travis Jackson이 타구를 더듬는 바람에 1사1. 2루가 됐다. 3아웃으로 공수교대가 되었어야 할 상황이 1사 1. 2루가 된 것이다. 안타 한방이면 월드시리즈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타석에 등장한 선수는 '캘리포니아의 백작' 이라는 별명을 가진 Earl McNeely. 그러나 그의 타구는 평범한 3루앞 땅볼에 그쳤다. 1루주자가 Johnson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병살타가 될 타구였다.

하지만,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 있을까?
McNeely의 타구는 또 다시 돌멩이에 맞아 불규칙바운드를 일으키면서 3루수 Lindstrom의 머리 위로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다. 그 돌멩이가 8회말 워싱턴에게 동점의 행운을 안겨준 바로 그 돌멩이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2루주자 Ruel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쏜살같이 홈까지 뛰어들었고, 결국 워싱턴은 극적인 4 - 3 승리를 거두며 창단 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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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 가까운 우승으로 Bucky Harris는 27세의 최연소 월드시리즈 우승감독이 되었고, 이듬해인 1925년에도 팀은 Sam Rice, Goose Goslin 이끄는 타선에 Walter Johnson과 클리블랜드로부터 영입한 Stan Coveleski의 활약으로 2년 연속 리그 패권을 거머쥐었지만, 피츠버그에게 월드시리즈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후, Walter Johnson의 은퇴와 맞물려 팀전력은 조금씩 약화되기 시작해 1928년 시즌을 끝으로 Harris는 디트로이트로 트레이드 되었다. 디트로이트에서 그는 선수로서 활약이 충분히 가능한 32살의 나이였음에도 덕아웃에서 팀지휘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1931년 선수로서 은퇴를 한다.

5년간 디트로이트를 맡아 팀성적은 비록 리그 하위권이였으나, 그가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1년만에 팀은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하였다. 1934년 보스턴, 1935년부터 1942년까지 8년간 친정팀 워싱턴, 1943년에는 필리스의 지휘봉을 잡았다가 성적부진으로 시즌중 해임되었는데, 선수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Harris의 해임에 불만을 품은 필리스의 선수들은 구단을 상대로 파업을 결의하기까지 하였다.

그가 맡았던 팀들이 전력 자체가 약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많이 기록하진 못했지만, Harris는 팀성적에 조급해하지 않고 내실있게 팀전력의 기틀을 잡아가며 선수들의 가능성을 믿었고, 선수들도 그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보냈다.

1947년 Larry MacPhail의 부름을 받고 양키스 감독에 오른 Harris는 약체팀을 이끌때는 상상하지도 못한 월드시리즈 우승을 다시 한번 만들어냈다. 그러나, MacPhail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Casey Stengel과 친분이 두터웠던 George Weiss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Harris는 그와 갈등을 겪게 되고 리그 우승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경질되고 말았다.

1949년 또 한번 워싱턴의 감독에 부임했다가 1956년 디트로이트에서의 지도자 생활로 감독경력의 종지부를 찍었고, 이후에는 보스턴의 단장직을 포함하여 스카우터로서 1971년까지 야구계에 몸을 담았다. 약 52년간 메이저리그의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선수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강조하며 선수들의 심리를 강조해왔던 Harris는 자신이 맡았던 팀의 전력이 애당초 약했던 관계로 승수(2,159승) 보다 패(2,218패)가 많아 감독 커리어 5할의 승률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반세기동안 메이저리그에 지대한 공헌을 한 명장이였으며, 1975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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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k Hafey, 안경을 끼고 선수생활을 하다
2경기 연속 노히트 경기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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