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19 21:28:46, Hit : 65, Vote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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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츠버그 최다승 감독 Fred Clarke



(사진출처 : 명예의 전당)


창단 후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피츠버그 Alleghenys(펜실바니아주를 통과하는 강의 이름)는 '피츠버그 Pirates'라는 팀명을 갖게 된 이후에도 팀성적이 나아질 기미는 없었다.

참고로 American Association(AA)소속의 필라델피아 A's에 Lou Bierbauer라는 2루수가 있었다. 그는 1890년 Monte Ward가 주도한 Player's League(PL)에서 1년동안 선수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PL이 내셔널리그, AA 등과의 경쟁을 극복하지 못하고 1년만에 사라지게 되고 이곳에서 활동한 선수들은 이전 소속팀으로 다시 복귀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피츠버그가 중심이 된 내셔널리그측이 이런 규정을 무시하고 그를 영입했고, 이후에도 그를 풀어주지 않자 해적(Pirates)이란 팀명이 붙게 되었다. 한때 내셔널리그보다 우위에 있던 AA도 결국 1891년을 끝으로 해체되었다)

한편, 맥주사업으로 돈을 모은 Louisville Colonels의 구단주 Barney Dreyfuss가 1900년 1월 피츠버그를 사들이면서 상황은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Dreyfuss는 Lousiville의 주축선수 14명을 피츠버그 유니폼으로 갈아입혔는데, Honus Wagner, Fred Clarke등이 그 주인공들이였다.
Dreyfuss, Wagner, Clarke. 이 3명은 1910년대까지 힘을 합쳐 피츠버그를 최고의 팀으로 올려놓은 주인공들이였다.  

Louisville에서 외야수로 데뷔한 Clarke는 화려한 메이저리그 신고식을 치루었다.
1894년 6월 30일 필리스를 상대로 한 데뷔경기에서 5타수 5안타(3루타 1개, 단타 4개)를 기록하였고, 이듬해에는 35경기 연속안타행진을 벌이기도 하였다.

24살의 나이에 팀의 감독까지 맡으면서 3할 승률에 허덕이는 팀을 5할 승률로 끌어올려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증명하였다. 피츠버그로 팀을 옮긴 후에도 Clarke는 Dreyfuss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주전 좌익수 겸 감독으로 계속해서 활약하였고, Deacon Phillippe을 대표되는 투수진 덕분에 소속팀을 리그 최고의 팀으로 변모시켰다.

감독을 겸직했음에도 Clarke는 5차례나 3할의 타율을 기록하였고, 1903년에는 32개의 2루타로 리그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타석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그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한경기 4개의 수비 어시스트를 포함, 9차례나 리그 최고 수비율을 자랑하였다.

승리를 향한 투지와 강인한 근성으로 똘똘 뭉친 그는 1915년 선수생활을 마치기까지 21년동안 통산 2,672안타 , 1,015타점, 타율.312의 성적을 남겼는데, 만약 감독직을 수행하지 않고 선수생활에만 매진했다면 3천안타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선수로서 이루지 못한 아쉬운 부분은 15년간의 피츠버그 감독시절에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1900년 피츠버그로 옮긴 뒤 전년도 리그 7위에서 단숨에 리그  2위로, 1901년부터는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특히, 1902년에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팀에도 선정될 만큼 화려한 승률을 기록하게 된다(103승 36패)

팀전력이 워낙 막강하였기에 Dreyfuss구단주는 1903년 시즌 개막전 보스턴 Pilgrims(現 레드삭스)의 Henry Killilea 구단주와 만나 양대리그 우승팀끼리 한번 대결을 하자고 제의했다. 바로 이것이 월드시리즈의 효시가 된 것이다. Dreyfuss 구단주를 비롯한 피츠버그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이길 것으로 확신했고, 많은 야구팬들 역시 피츠버그의 압승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을 했다.

1차전에서 피츠버그의 에이스 Deacon Phillippe이 상대선발 Cy Young을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며 피츠버그가 보스턴을 누르고 내셔널리그의 자존심을 지키는 듯 보였다. 하지만, Phillippe의 월드시리즈 5경기 완투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보스턴이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뜻밖의 패배로 피츠버그는 몇년간 뉴욕 자이언츠와 컵스에게 밀려 리그 왕좌를 내주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Dreyfuss구단주와 Clarke가 아니였다. Dreyfuss는 1909년 최초의 철골구조 경기장인 Forbes Field를 완공하며 재도약을 부르짖었고, 근성으로 유명했던 Clarke 역시 선수들을 채직찔하며 정규시즌 110승 42패의 성적을 기록, 피츠버그 팀역사상 한시즌 최다승이였다.

상대팀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Ty Cobb이 버티고 있는 디트로이트.
6년만에  다시 리그우승을 탈환하며 월드시리즈 첫 우승에 도전하는 피츠버그 못지 않게 디트로이트 역시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정상에서 미끄러진 터라 우승에 대해 갈망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7차전까지 가는 승부답게 매경기가 치열하게 진행되었지만, Clake의 예상치 못한 지략으로  피츠버그가 왕좌에 오르게 된다.

Clarke는 Vic Willis, Howie Camnitz 등 팀의 에이스급 투수들을 제쳐놓고 메이저리그 초년생인 Babe Adams를  1차전부터 기용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예상밖의 투수기용에는 이유가 있었다.
1909년 아메리칸 리그의 워싱턴 세너터스에 Dolly Gray라는 투수가 있었다. 리그 최약체의 팀이였기 때문에 개인성적도 그리 좋을 리 없었던 Gray는 정규시즌 5승 19패의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였는데, 이상하게도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만큼은 2승 무패, 0점대의 평균자책점으로써 디트로이트 타자들을 철저히 농락한 것이다.

이점을 간파하고 있던 Clarke는 Gray와 흡사한 피칭 스타일을 갖고 있던 Admas를 기용하여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화력을 자랑한 디트로이트의 타선을 막겠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1차전부터 들여맞았다. Clarke의 기대에 부응한 Adams는 가장 중요했던 7차전에서는 Cobb을 4타수 무안타로 완전히 틀어막았고, 시리즈동안 Cobb을 11타수 1안타로 봉쇄시켜 혼자서 월드시리즈 3승을 올리게 된다.
Clarke 역시 타석에서 한경기 5개의 희생번트(월드시리즈 기록)를 포함, 2홈런, 7타점으로 감독과 선수로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쾌거를 올렸다.

1915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피츠버그 지휘봉을 잡은 16년동안 1,422승을 기록하였고, Louisville 시절을 포함하면 통산 1,602승(월드시리즈 우승 1회, 리그 우승 4회)으로 명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925년 다시 코치 겸 구단부사장으로 복귀하여 감독시절 선수로 데리고 있던 Bill McKechnie을 보좌하며 팀의 우승을 지켜보기도 했지만, 일부 선수들과 갈등을 빚어 오래 몸담지는 않았고,  피츠버그 출신으로는 Honus Wagner에 이어 2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1945년 베테랑 위원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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