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8-12-06 22:07:05, Hit : 52, Vote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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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드볼 시대 최고의 2루수 Eddie Collins


<사진출처 : 명예의 전당>

1928년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3명의 선수가 나란히 뛰는 보기드문 일이 있었다.세 선수 모두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은퇴를 앞둔 상태였는데, Dead Ball 시대를 빛낸 이들은 바로,Ty Cobb, Tris Speaker, 그리고Eddie Collins였다.

Speaker와 Collins는 Cobb이라는 커다란 장벽 때문에 매시즌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만년 2인자 위치에 만족해야 했지만,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는 메이저리거들이였다. Collins의 경우 메이저리그 100년사를 정리하는 1999년 밀레니엄 행사에서 내노라하는 여러 야구전문가들로부터 최고의 2루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야구전문 사이트인 'The Baseball Page'에서는 Collins에 대하여Tim Raines의 도루능력에 Tony Gwynn의 타격을 갖춘 Roberto Alomar'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명문 콜롬비아 대학의 야구팀 주장과 풋볼팀 쿼터백으로 활약한 Collins는 1906년 1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데뷔를 하게 되지만, 대학생 신분이라는 점등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데뷔 2년간은 대학야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1909년부터 풀타임 시즌을 맞이한 그는 타율, 출루율, 최다안타 등에서 Ty Cobb에 이어 리그 2위의 성적을 기록하며, Dead ball 시대 최고의 타자중 한명임을 증명하였다..

1916년까지 8년 연속 타율3할, 4할 중반대의 출루율로 팀의 간판타자로 부상한 Collins는 1912년부터 약 4년동안 3년 연속 리그 최다득점과 함께 평균 120득점을 올렸고 1915년까지 3루수 Frank Baker등과 함께 '10만$의 내야진\'을 구축하며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

통산 744개의 도루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빠른 발과 최고의 주루센스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1912년 9월 11일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무려 6개의 도루를 성공시켰으며,  9월 22일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現 볼티모어)와의 경기에서도 똑같은 성적을 기록, 20세기 현대 메이저리그  한경기 최다도루와 타이를 기록하였다. .

Cobb에 대적(?)할 만한 적극성은 아니였지만, 'Cocky(자부심)' 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Collins도 당시 최고의 선수들 못지않게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유의 카리스마로써 팀의 리더 역할을 했다. 일단 외형상으로 나타난 성적이 여타 평범한 선수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을뿐더러 야구에 대한 열정등 모두가 부러워 할 만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기에 동료들의 신뢰 역시 절대적이였다고 한다. .

어슬레틱스에서 보낸 10여년의 시간을 뒤로 한채 Federal League의 출범여파 등으로 재정문제에 부딪힌 어슬레틱스 Connie Mack 감독은 팀의 스타급 선수들을 모두 팔기 시작했고, Collins 역시 5만$에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팀을 옮기게 된다. 5년간 7만 5천$의 새로운 계약을 맺고 시작한 시카고에서의 활약도 예전못지 않았다. .

1917년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는 4회초 안타와 상대팀의 에러등으로 3루까지 진루한 이후 투수앞 땅볼 때 홈으로 쇄도하다가 포수와 3루수의 협살 플레이에 걸려들 뻔 했지만, 재치있는 주루플레이로 득점에 성공, 역대 월드시리즈중 가장 재치있는 플레이로 평가를 받기도 했다. .

1919년 신시내티와의 월드시리즈에서 터져버린 'Black Sox 스캔들'로 영구제명된 9명의 선수와는 달리 Collins는 승부조작에 참여하지 않아 특별한 처벌없이 계속해서 시즌을 소화했고 1920년 커리어 최고타율.372224안타등으로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특히, 224안타는 아직까지도 화이트삭스의 한시즌 최다기록으로 아직 유효한 상태이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도 그의 타격은 좀처럼 녹슬지 않아 타율, 출루율, 도루에서 리그 상위권에 이름을 내밀며 젊은 시절못지 않게 리그 최고를 달리고 있었다. 1925년 시즌 중반 지휘봉을 맡으며 3년간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기도 한 Collins는 Speaker가 3천안타를 기록한 뒤 20여일이 지난 1925년 6월 3일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역대 6번째로 3천안타를 수립하였고, 1927년 친정팀인 어슬레틱스로 복귀하여 1930년을 끝으로 25년동안의  메이저리그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

어슬레틱스에서 4회, 화이트삭스 에서 2회, 총 6차례의 월드시리즈에 참가하여 3번이나 4할타율을 기록하였고, 월드시리즈 통산 14개의 도루를 성공함으로써 Lou Brock과 함께 월드시리즈 최다도루부문에서 우수한 성적을 남겼다. 작전수행능력, 번트, 기동력을 두루 갖추었고, 타구를 원하는 방향으로 모두 보낼 수 있는 스프레이 히터였던 그는  Dead ball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타자였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

9차례나 기록한 리그 최고수비율, 2루수로서 2,650경기출장, 통산 어시스트 등은 여전히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이 Collins를 최고의 2루수라고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통산 3,311안타, 타율.333등의 성적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데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1939년 77.74%의 득표율로 헌액되었다. .

은퇴를 앞둔 상황에서 양키스를 비롯한 여러팀에서 그를 감독에 앉히기 위해 구애를 펼쳤지만, 정작 Collins 스승 Connie Mack 감독을 보좌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계속된 여러팀의 러브콜을 마다했던 그는 보스턴의 젊은 구단주 Tom Yawkey 의 끈질긴 요청으로 1933년부터 15년동안 단장 및 스카웃터로서 활약하며 Jimmie Foxx, Lefty Grove, Joe Cronin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신예 Ted Williams와 Bobby Doerr를 스카웃한 점은 Collins의 커리어를 빛내는 또 하나의 결과물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 Yawkey구단주와 함께 흑인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소극적이였으며, 이로 인해 보스턴이 메이저리그 구단중 가장 늦게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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