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20-10-17 22:21:34, Hit : 6,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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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블랜드의 강타자 Rocky Colavito


><사진출처 : wikipedia><br><br><br><br>1954년 111승이라는 역대 최다승을 기록하고도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서 힘없이 물러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사진출처 : wilkipedia>

 

1954년 111승이라는 역대 최다승을 기록하고도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서 힘없이 물러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50년대 초반까지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Bob Feller등의 스타선수들이 은퇴한 이후 팀성적 추락과 함께 팀인기도에서도 급격히 추락하며 한때 메이저리그 최악의 관중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기간은 잠시였다. 1956년부터 새롭게 모습을 보인 슬러거 한명이 메이저리그를 경악시켰기 때문이었다. Rocky Colavito는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로 야구장에 발길을 끊었던 수많은 여성팬들을 포함하여 많은 야구팬들을 다시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으로 불러들였고, 특히, 장타력 부문에서 '제2의 Babe Ruth'라는 별명을 얻을정도로 무시무시한 홈런을 쏘아댔다.

1955년 메이저리그에 첫 선을 보였던 그는 원래는 타자가 아닌 투수였다. 최고 150km까지 뿌릴 수 있는 강견을 자랑할 정도로 투수로서 기대를 받으며 클리블랜드에 입단하였지만, 당시 클리블랜드는 팀내 에이스였던 Mike Garcia를 필두로 Herb Score와 같은 유망주등으로 막강한 마운드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타자로 전향, 2년간 마이너를 경험한 이후 타석에서 더 강한 잠재력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풀타임 첫해인 1956년 21홈런을 기록한 Colavito는 매시즌 평균 25홈런 성적과 함께 리그 최고의 파워히터로 성장하였고, 장타율에서 리그 1위를 차지한 1958년에는 생애 첫 40홈런으로 양키스의 Mickey Mantle에 한 개차로 뒤져 리그 홈런 부문 2위에 머무르긴 했지만 야구팬들에게 자신의 진가를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1959년 6월 10일 볼티모어와의 원정경기에서는 4연타석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42홈런을 쏘아올려 2년 연속 +40홈런을 달성, 워싱턴 세네터스(현 미네소타 트윈스)의 Harmon Killebrew와 함께 리그 홈런왕을 차지하였다. 타율이 2할 중반대에 머물러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진 않았지만, 팀내 유일한 +100타점으로 부상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벽하게 소화하였다. 데뷔 이후 4년간 총 130홈런, 380타점으로 어느 누구도 성적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깨끗한 매너와 잘생긴 외모로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면서 한때 9,000명대로 추락한 홈관중동원을 20,000명까지 끌어올려 구단에 있어서 보석같은 존재가 바로 Colavito였던 것이다.

하지만, 1960년 개막 하루전날 클리블랜드 팬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당시 단장이었던 Frank Lane은 전년도 리그 타격왕이었던 디트로이트의 Harvey Kuenn을 얻기 위해 팀내 최고의 타자였던 Colavito를 트레이드 카드로 들고 나오는 이해하기 힘든 선택을 한것이였다. 비록, 타율에서 1할의 차이가 날 정도로 Colavito의 정확성이 아쉬운 건 사실이였지만 Kuenn은 한해 평균 8개정도의 홈런에 그친 타자였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중 하나에 선정되기도 한 이 사건으로 클리블랜드 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 거리시위를 벌이며 Lane단장을 비난하였고, 심지어는 살해협박까지 하며 자신들의 스타인 Colavito를 트레이드 시킨 Lane을 향해 거침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반면 얼떨결에 리그 최고의 타자를 얻게 된 디트로이트 팬들은 연일 쾌재를 불러댔다. Al Kaline, Charlie Maxwell의 기존의 외야라인에 리그 최고의 파워히터인 Colavito가 가세하면서 디트로이트는 양키스 못지 않은 공격력을 보유할 수 있었고, 팀전력도 차츰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적 첫해 35홈런으로 다소 부진(?)하기도 했지만, 후반기부터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1961년의 대활약을 예견하였고, 45홈런, 140타점으로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내면서 디트로이트 팬들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팀은 비록 양키스의 무적행진에 밀려 2위에 리그 2위에 그쳤지만, 102승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디트로이트의 최고 스타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한편, 그의 활약과 달리 Harvey Kuenn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활약을 보여 1년간의 클리블랜드 생활을 끝으로 샌프란시스코로 트레이드 되었고, 황당한 트레이드를 주도했던 Lane단장은 팬들의 비난과 6000명도 미치지 못하는 처참한 홈구장 관중탓에 적자재정을 초래하여 단장직을 내놓고 사라졌다

1962년에도 37홈런, 112타점으로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준 이후 캔사스티 어슬레틱스로 이적한 1964년에는 커리어 여섯번째 +30홈런과 +100타점을 기록하였다. 1965년 친정팀 클리블랜드로 다시 복귀하여 2년간 평균 30개를 넘나드는 홈런과 100타점으로 여전히 식지 않는 파워를 과시하였지만 무릎부상으로 하항세에 접어들었고 이후 화이트삭스, 양키스, 다저스를 거쳐 1968년 14년간의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마감하게 된다. 올스타 6회과 통산 374홈런, 1,159타점의 성적을 남겼던 그는 투수 출신답게 강력한 어깨로서 많은 Assist와 안정된 수비로 1965년에는 162경기 연속 무실책 기록을 달성하기도 한다.

또한, 1968년 양키스 시절에는 투수로 깜짝 등판하여 1승을 챙기기도 하였다. 부상없이 좀더 오랜 선수생활을 했더라면 역사에 남을 만한 성적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고, 동시대에 Mikey Mantle, Roger Maris, Harmon Killebrew등 역사에 남을 만한 홈런타자들이 즐비하였기에 다소 빛이 바랜점도 있지만, 한경기 4개의 홈런을 몰아치는 집중력과 파워로서 시대를 대표하는 슬러거로서 인정 받았으며 자선활동과 같은 많은 사회봉사로도 사랑을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스포 스타중 한명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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