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3 21:50:43, Hit : 80, Vote : 8
 ED_Delahanty.jpg (65.5 KB), Download : 0
 전설의 강타자 Ed Delahanty



<사진출처 : 명예의 전당>


걸음마 단계를 지나 나름대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던 1890년대의 메이저리그.
Ed Delahanty는 시대를 대표한 최고의 선수였다. 그가 110여년전에 수립한 기록들은 불멸의 기록들중 하나였으며, 30대 중반의 나이를 넘어선 시기에도 최고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1930년대 후반 Joe DiMaggio가 등장했을 때 많은 야구인들은 Delahanty가 부활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런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Delahanty가 어떤 선수였는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Delahanty의 7형제는 주인공 Ed를 포함한 5명이 모두 메이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였는데, 그중 실력면에서 으뜸은 맏형격인 Ed Delahanty였다.
1887년 프로에 본격 입문, 그리고 이듬해에 1,500$의 계약금을 받고 필리스에 입단했지만, 2루수와 유격수로 활동하면서 별다른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Player's League에서 1년동안의 생활을 마치고 다시 내셔널리그로 복귀하면서 부터이다.

1892년 21개의 3루타로 리그장타율 1위를 차지하였으며, 1893년에는 219안타, 타율.368, 19홈런, 143타점으로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독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Ed Delahanty가 앞으로 연주할 웅대한 교향곡의 전주곡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페이지에 장식될 여러 가지 기록들을 수립하였다.

이미 1890년에 한경기 6안타를 기록했고, 1896년에도 이와 똑같은 기록을 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10타석 연속안타, 한경기 4개의 2루타(1899년), 그리고 1896년 7월에는 컵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역대 2번째로 한경기 4개의 홈런을 쏘아올리기도 하였다.

장타력과 함께 타격의 정확성까지 겸비했기에 한시즌 4할타율을 3차례나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시대에 활약했던 Jesse Burkett을 비롯, Ty Cobb, Rogers Hornsby만이 달성했던 대위업이고, Jesse Burkett의 4할타율에 대한 신뢰성 문제가 약간 지적되고 있기 때문에 Delahanty가 이 부문에서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생애 첫 4할타율을 기록했던 1894년 리그타격왕까지 내심 기대해봤겠지만, Delahanty를 포함해서 무려 5명의 선수가 4할을 넘어섰고, 보스턴의 Hugh Duffy가 무려 4할 4푼의 엄청난 타율로 시즌을 마감한 상태였다.

1895년에도 4할을을 기록했지만, Jesse Burkett에게 타격왕 자리를 내줬고, 1899년이 되어서야 238안타와 함께 커리어 최고 타율.410로 타격왕을 거머쥐게 된다. 이해 최다안타부문과 장타율등에서 당연히 그의 이름이 맨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로 게임수보다 더 많은 타점과 득점을 동시에 기록한 시즌이 총 3차례나 되었는데, 참고로 Babe Ruth가 4차례, Lou Gehrig등은 1차례에 불과했다. 리그 최다도루까지 차지할 정도로 공수주에서 그는 완벽에 가까운 선수였다.

통산타율.346(역대 5위)등으로 1945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헌액까지 되긴 했지만, 그의 이른 죽음은 더욱 강렬한 이미지를 남길 수 있는 기회를 막아 버리고 말았다.


◈ 나이아가락 폭포에서 추락사한 전설의 타자 (From : imbc)

그는 배트로 공을 쳐서 양분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1890년대 투수로 활약한 Frederick Schmit 는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Delahanty와 승부할 때는 두눈 꼭 감고 공을 던지야 한다. 신에게 그저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다"
한번은 Schmit가 공 3개로 Delahanty를 삼진을 잡은 뒤
'이 정도면 내가 최고의 투수임에 틀림없겠지' 라며 자화자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완벽함을 갖춘 선수였던 Delahanty는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안고 있었다.
도박과 술에 지나칠 정도로 탐닉해 있었고, 여성편력도 선수생활에 골머리를 앓게 한 요인이었다. 도박으로 진 빚을 연봉으로 메워나가기 일쑤였고, 연봉으로도 해결하기 힘들 때에는 동료들에게 자살을 하겠다며 동정심을 유발해 돈을 빌리기도 하였다.

아들의 불안한 생활 때문에 Delahanty의 어머니는 원정경기에 따라다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20세기를 맞이하면서 내셔널리그에 대항하여 Ban Johnson이 중심이 된 아메리칸 리그가 정착하게 되고, 내셔널리그의 우수한 선수들을 사들이게 되는데, Delahanty는 당시 최고연봉인 3천$를 조건으로 필리스 잔류를 선택했다. 하지만, 1901년 절친했던 팀동료 Nap Lajoie가 아메리칸리그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마음의 동요가 일었고, 게다가 팀주장인 Hughie Jennings와의 불화로 팀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1902년 새로 계약한 팀은 Washington Senators로 연봉은 무려 4천$에 육박했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도 그의 배트는 이전과 차이가 없었다. 타율.376을 비롯하여 장타율, 출루율 등에서 리그 정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자신이 벌어들인 수입을 도박으로 모두 날려 버리고 말았다. 뉴욕 자이언츠의 감독 John McGraw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Delahanty를 몰래 찾았다. McGraw는 워싱턴의 한 경주장에서 Delahanty가 마지막 돈마저 잃는 순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3년간 2만 4,000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연봉을 제시, Delahanty를 꼬득였다.

뉴욕 자이언츠로 입장을 정했지만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1903년 1월 양대 리그가 상대방 선수를 뺏어가지 않는다는 평화조약을 체결했기 때문. 이 조약으로 인해 뉴욕 자이언츠의 John Brush 구단주는 Delahanty 와 전 디트로이트 소속의 George Davis를 다시 아메리칸리그로 되돌려 보냈다.

보다 많은 현금을 원했던 Delahanty 는 어쩔 수 없이 워싱턴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됐다. Delahanty 는 이후 사기가 떨어지면서 1903년 3할대 밑의 타율을 기록했다. 게다가 뉴욕 하이랜더스와 계약도 실패로 돌아가자 완전히 돌아버렸다.

종종 팀을 떠나 행방을 감췄고 원정경기 숙소인 한 호텔에서는 가스밸브를 열어 자살하려고도 했다. 다행히도 룸메이트가 이를 말려 목숨을 건졌다.

1903년 7월2일. 술에 취해 있던 Delahanty는 절망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George Davis가 마침내 뉴욕 자이언츠와 계약을 해도 된다는 기회를 얻은 것이였다. 본인도 잘하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급히 디트로이트에서 뉴욕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를 탄 지 8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Delahanty가 위스키를 잔뜩 먹은 뒤 추태를 부렸다.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여인의 발목을 잡고 내동댕이 치려한 것이다. 이에 기차 승무원이 Delahanty를 내쫓기로 마음을 먹었다. 기차는 마침 캐나다 국경쪽의 인터내셔날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승무원은 Delahanty를 하차시켰다. Delahanty는 비장한 목소리로 이제 난 캐나다에 있든, 죽든 상관없다며 교각 위에 내렸다.

교대 근무를 위해 나오던 Sam Kingston이라는 이름의 교각 경비원이 철 기둥에 서 있는 Delahanty를 발견했다. 랜턴을 비추기까지 누군지 몰랐던 경비원은 Delahanty를 말리려 다가섰다. 그러나, Delahanty는 이를 뿌리치고 달려갔고 뒤이어 다리 6m 아래의 물표면에선 거품이 일고 있었다.

시체는 사건발생 1주일후 발견되었다.




Name
Memo      


Password


커브볼의 창시자 Candy Cummings(출처 : mlbbada.com)
니그로리그의 Dick Redding, 한 시즌에만 노히트경기 7회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