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4 18:53:49, Hit : 78, Vote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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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브볼의 창시자 Candy Cummings(출처 : mlbbada.com)




(출처 : mlbbada.com)

일단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을 보면 왜 이렇게 허접한 투수를 소개하려 하는가 궁금해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통산 43경기 출장 21승 22패 고작 2년의 선수 생활...
완투 경기가 총 40 경기였고 사사구 허용 비율이 굉장히 낮았다는 것 외에는 특이할 것이 없는 2. 3 류 투수로 보인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이며, 초창기 미국 야구사를 논하는데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또한 투수의 투구에 이 선수만 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수는 전무후무하다는 사실이다.

Candy Cummings는 1848년 10월 18일 메사츄세츠 웨어(WARE)라는 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했고, 하루의 대부분을 친구들과 어울려 야구를 하며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보냈다.

그 당시는 메이저의 모체이자 진정한 프로페셔날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내셔날리그(이하 NL) 가 생기기 훨씬 전 이었다. 그 당시는 지금의 실업팀이나 직장인 동호인팀 같은 성격의 팀들이 엄청 많았고, 팀들간의 실력의 격차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으며, 또한 리그도 여기 저기 중구난방으로 퍼져있고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서 소수의 슈퍼 탈렌트들을 제외하고는 야구를 직업으로 여기기가 참 힘든 시기였다.

그 당시는 동네마다 아마추어 리그 또는 세미프로 리그마다 약간씩 룰과 구장 규격마저 틀렸다. 현대 야구와 가장 틀린 점은 투구에 있었다. 우선 마운드에서 포수까지의 거리가 지금 보다 짧았으며, 스트라이크 죤도 무릎에서 어깨까지 엄청 넓었던 관계로 포수들이 투수의 공을 포구 할 때 엉거주춤 서서 공을 받았다.

또한 투수들은 지금과 같은 반발력이 좋은 코르크에 실을 감아 가죽으로 감싸 108개의 박음질로 만든 공이 아닌, 정말 "실이나 헝겊 종류의 이물질을 둘러싼 가죽 구형 물체(소위 반발력이 약한 죽은 DEAD BALL), 봉합은 실로 꿰메서..." 라는 표현이 알맞은 공으로 투구를 하였다. 그 당시 투수들의 투구 매커니즘은 오로지 공을 있는 힘을 다해 타자가 치지 못하게 빠르게 던지는 방식의 투구였다. 변화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오로지 직구만 존재했다.

▣ 조개 껍데기의 교훈

다시 Cummings 얘기로 돌아와서,,,
Ware 근처의 강가에서 야구를 즐기던 Cummings는 심심풀이로 조개 껍데기를 허공에 던지며 놀다가 조개껍데기가 회전을 하며 커브를 그리는 것을 보고 "야구공에 도 회전을 주어 공의 궤적에 변화를 주면 타자들을 속일 수 있겠는데.." 하는 당시로써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주위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도 Cummings는 뼈를 깎는 노력을 계속 하였다. 여러 가지 그립을 시도해 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에 회전을 주는 연구를 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노력을 계속했다. 나중에는 너무나 손끝에 물집이 자주 생겨 공에 회전을 주는 연습이 불가능하였으나, Cummings는 장갑을 끼고서 투구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고진감래! 그리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지 수년이 지난 후에 드디어 현재 투수들도 사용하고 있는 그립과 투구방법의 "커브"를 완성하게 된다.

드디어 '커브'라는 그 당시에는 세상에서 Cummings 단 한명만 구사 가능한 마구를 들고 하산한 Cummings는 야구선수들에게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Cummings는 은퇴 후 1908년 그가 직접 집필한 자서전 성격의 "How I Pitched the First Curve" 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A surge of joy flooded over me that I shall never forget. I felt like shouting out that I had made a ball curve. I wanted to tell everybody - it was too good to keep to myself."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큰 감격의 기쁨이 나를 흥분케 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커브를 완성한 것을 소리쳐 알 리고 싶었습니다. 나 혼자 간직하기엔 너무나도 벅찬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소리쳐 그가 커브를 완성했음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단지 던져서 보여 주는것 만으로도 야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었다. 그 당시의 큰 스트라이크죤에 적용된 그의 커브는 도저히 칠 수 없는 마구 그 자체였다.

더 한가지 사람들을 경악케 한 것은 Cummings의 신체적 약점이었다. 그의 키는 175cm 몸무게는 54kg, 운동선수가 아닌 일반인의 체격으로도 너무나 볼 품없는 왜소한 선수였다. 갑자기 커브라는 마구를 들고 나타난 왜소한 청년의 이름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너무나 오래된 시절의 야구경기였기에 그의 모든 기록이 세세히 남아 있지는 않으나, 그 당시 신문이나 칼럼을 통해 그가 얼마나 공포와 신비의 대상이었는지는 쉽게 느낄 수 있다.

NL이 창립되기 전 그 당시 최고의 리그 였던 National Association (NA)리그에서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시작한 Cummings는 "Candy" 라는 애칭을 얻게 되는데 그 당시 Candy 라는 단어는 'the Best' 라는 뜻으로 쓰였으니 그가 얼마나 눈부신 활약을 했는지는 설명 이 필요 조차 없을 것이다.

199경기에 선발 등판해 194경기를 완투하였으며, 1873년과 1875년 에는 35승을 거두며 야구계를 평정하였다. 124승 72패(194경기 완투), 방어율 2.71의 눈부신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현재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은 리그의 배타적 성격상 NL과 AL와 초창기 전신리그 기록 외 다른 리그의 성적은 정식 성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Cummings의 통산 성적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 NL의 설립과 초대 마이너리그 총재

1877년 현 메이져리그의 모체라 할 수 있는 NL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최고의 선수들로 팀들이 다시 개편되었다. Cummings도 당연히 NL에 몸을 담게 되었다.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즈(現 신시내티 레즈)의 멤버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그의 야구 마지막 시즌을 보내게 된다. 전년도에 Hartford Dark Blues의 구단주 겸 선수로 16승 8패, 방어율1.67 의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던 Cummings는 팀이 저조한 성적으로 NL 예비리그에서 탈락되자 상당히 심적으로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신시내티로 몸을 옮겼지만 야구에 대한 의욕을 크게 상실한 Cummings는 5승 14패 4.34 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 도중에 은퇴를 결심하였다.

Cummings는 이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냥 야구하기가 싫었어, 왜 이리 규약도 많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많은지... 난 이미 꿈을 이룬 상태였어. 커브를 창시했고, 나의 노력과 시도가 웃음거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족해"  

NL에서는 각고의 노력으로 신체적 약점을 딛고 새로운 커브라는 구종을 탄생시킨 Cummings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NL산하 최초의 마이너리그인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의 초대 총재에 추대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만 29세 였다.

Cummings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29세에 은퇴를 할 당시에는 젊은 나이에 너무나 무리하게 커브를 연마해 어깨와 팔꿈치가 많이 망가진 상태로 커브를 거의 던지지 못하는 상태였다. 2년 후 그는 완전히 야구계를 떠나 사업가로 변신해 제2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갔고, 1939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남들보다 작고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로지 커브 발명에 젊음을 바쳐 짧지만 굵게 선수 생활을 하며 존경을 받았으며, 프로 야구단의 구단주 그리고 마이너리그 초대 총재를 역임하며 메이져 역사에 굵은 획을 남긴 Candy Cummings같은 인물들이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오늘날 메이져의 풍성한 역사를 가능케 했다.

사실 커브에 시작과 개발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2002년 ESPN 매거진 5월호에는 우리가 들어보지도 못했던 Fred Goldsmith라는 투수를 비롯하여, Phony Martin, Fred McSweeney가 미리 선보였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며, 최초의 야구기자라고 할 수 있는 Henry Chadwick은 1850년대 직접 취재하던 한 경기에서 커브를 본 적이 있다는 의견을 밝힌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ummings에게 커브의 선구자라는 위대한 칭호가 따라오는 이유는 그가 메이저리그 초창기 시절 리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그 자신도 리그에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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