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4 19:37:32, Hit : 82, Vote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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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r. Cub' Ernie Banks




야구에 별다른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은 흑인 소년이 있었다.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이 야구에 조금이라도 재미를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동네 야구경기에  참여할 때마다 매번 용돈을 손에 쥐어주면서까지  야구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  

1956,60년대메이저리그 최고의 유격수로 극찬을 받았던 Ernie Banks의 야구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학창시절 야구보다는 풋볼과 소프트볼에서 인정을 받았던 그는 야구선수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12형제중 둘째였기에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으로 17세가 되던해에 경기당 15$를 받고 KC Monarchs에 입단하였다.

니그로리그의 전설적인 스피드왕 Cool Papa Bell이 감독을 맡고 있던 Monarchs는 Satchel Paige 등 수많은 리그 스타들이 몸담았던 최강팀이었다. 이곳에서 유격수와 3루수로 활약하면서 그는 실력을 쌓아나갔고, 2년간의 군복무후 다시 원소속팀으로 복귀하여 계속해서 니그로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Banks가 군대를 제대할 당시에는 Jackie Robinson이 이미 인종의 벽을 허문 이후여서 재능있는 흑인선수들은 하나둘씩 메이저리그로 팀을 옮기기 시작했다. Banks 역시 마찬가지였다.

컵스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졌고, Monarchs의 구단주는 마이너리그 기간없이 메이저리그에서 바로 뛰게 하는 조건으로 Banks를 컵스로 이젹시켰다.
1953년 시즌 막바지에 빅리그에 공식 데뷔,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안타없이 수비에서 에러를 범하는 등 평범하게 신고식을 마치긴 했지만. 시카고 컵스 최초의 흑인 선수로 구단역사에 기록된 의미있는 순간이었다. 물론, Monarchs에서 함께 선수생활을 하기도 한 Gene Baker가 컵스와 먼저 계약을 체결하긴 했지만, 메이저리그 공식 데뷔는 Banks가 10여일정도 빨랐다.

니그로리그에서 소속팀의 주전유격수로 활약한 Baker를 2루로 밀어내고 컵스의 유격수 자리를 꿰찬 Banks는 왜소한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정상급의 빠른 스피드와 임팩트 순간 힘을 집중시키는 능력, 힘과 유연성을 동시에 갖춘 손목회전등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데뷔 첫해 19개의 홈런을 쏘아올리며 장차 리그를 대표할 홈런타자임을 예고하였다. 수비에서도 나무랄데 없어 훗날 골든글러브 수상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풀타임 2년째이던 1955년 44홈런, 117타점의 가공할 만한 공격력으로 올스타에 선발되는 등 스타 플레이어로  급성장하게 된다. 특히, 9월중순에 있었던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5번째 그랜드 슬램을 작렬시키면서 Babe Ruth 등이 가지고 있던 메이저리그 한시즌 최다만루홈런 기록을 경신하기도 하였다.

Banks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컵스는 리그 최약체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60년까지 팀내에서 세자리수 타점을 기록한 선수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홈런에서도 Banks가 쏘아올린 홈런숫자의 절반을 기록한 선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Phil Cavarretta, Andy Pafko, Hank Sauer등 1940년대 후반부터 컵스를 이끌었던 선수들도 하나둘 은퇴와 이적을 했고, 특별히 주목할 만한 신인도 배출되지 않은 상태여서 팀을 대표할 선수는 Banks를 제외하고는 명함을 내밀기도 초라할 정도였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부상으로 잠깐 주춤했던 1956년을 제외하고는 매시즌 평균 40개가 넘는 홈런으로Hank Aaron, Willie Mays, Eddie Mathews 등과 함께 리그를 대표하는 슬러거로서 입지를 완전히 굳혀나갔다.

뛰어난 배팅실력과 함께 무거운 배트에서 가벼운 배트로 바꾼 것도 홈런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던 한 이유였다. 당시 메이저리그의 일반적인 홈런타자들은 39온스(약 990g)의 배트를 사용한 반면 Banks는 32온스(약 900g)의 배트를 사용하여  배팅스피드를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1958년에는 홈런(47개), 타점(129), 장타율에서 리그 1위를 차지, 팀이 5할 승률에도 미치지 못했음에도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되고, 그 당시 파워히터 유격수였던 보스턴의 Vern Stephens을 제치고 최고의 슬러거형 유격수 왕좌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이해 쏘아올린 47개의 홈런은 2001년 A-Rod가 경신하기 전까지 메이저리그 유격수 부문 한시즌 최다홈런 기록이었기에  역사적 의미는 더욱 값진 것이었다.

이듬해인 1959년에는 Eddie Mathews에게 홈런왕 타이틀을 내줬지만, 홈런(45개), 타점(143)으로 팀의 성적과 관계없이 기자들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2년 연속 리그 MVP를 수상하였다.

20대의 마지막 시절인 1960년에도 Banks의 홈런은 그의 환한 미소처럼 Wrigley Field를 환하게 밝혔다. 시즌 첫 16경기에서 12홈런, 25타점을 기록했고, 48경기가 지난 시점에서도 25홈런, 67타점으로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팀성적은 18승 30패로 리그  최하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자신을 지원해줄 믿을 만한 타자가 없다보니 투수들의 견제는 심해졌고, 경기를 거듭할수록 Banks의 공격도 조금씩 무뎌지기  시작했다. 41홈런, 117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했는데, 팀내에서 Banks에 이어 가장 많은 홈런을 친 George Altman의 홈런수는 고작 13개였으며, 타점 역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3타점에 불과했다.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기 직전 모든 선수들은 희망에 가득차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Banks에게 1961년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가져다준 시즌이었다. 베이스 러닝 도중 오른쪽 무릎을 다쳤고, 부상을 무릅쓰고 경기에  출장하다 보니 무릎에 무리가 가고 말았다. 이전까지 혼자서 팀공격을 책임져야 했던 것과는 달리 신예 Billy Willams, Ron Santo가 가세하면서 매서운 공격력과 팀조직력을 갖춘터라 그의 부상은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4년 연속 한시즌 +40홈런을 기록하던 무서운 페이스는 29개로 줄어들었고, 많은 움직임이 필요한 유격수 수비도 조금씩 부담이 따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팀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구단의 권유에 따라 1962년부터 1루수로 전향하게 된다(이때의 부상으로 Banks는 유격수보다는 1루수로 더 많은 경기에 참여하게 된다)

무릎부상을 당했다고 해서 Banks가 순식간에 무기력해진 것은 물론 아니였다. 여전히 30개에 근접하는 홈런과 팀의 중심타자로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수비에서도 리그 정상급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포지션 변경과 고질적인 무릎통증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팀의 간판타자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니그로리그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Buck O'Neil이 1962년부터 컵스의 코치로 부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O'Neil이 컵스코치로 부임하면서 그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코치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무릎부상 이후 1루수, 외야수로 잦은 수비이동을 하면서 심리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워 하던 시기에 스승이나 다름없는 O'Neil의 존재는 Banks에게 큰힘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Banks의 부상과 맞물려 컵스는 1960년대 초반 팀창단 이후 최악의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츄잉껌을 팔아 벌어들인 돈으로 컵스를 매입한 아버지 William Wrigley의 뒤를 이어 30년 가까이 팀을 소유하고 있던 Philip Wrigley는 Lou Boudreau등 여러명의 감독을 앉혀가면서 팀재건을 노렸지만, 1962년에는 59승 103패라는 창단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기까지 하였다. 화가 난 Wrigley는 시즌이 끝나고 대학팀에서 감독을 섭외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시즌을 거듭해도 팀성적은 나아지지 않았고, Banks 역시 3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고질병이 된 무릎통증은 더욱 그를 힘들게했다. 1966년에는 풀타임으로 활약한 이후 최저인 15개의 홈런에 그쳤다.

팀을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부진하자 Leo Durocher 감독은 "Banks는 이제 한물갔다" 라는 발언으로 Banks를 직접 비판하였다. 한 성깔하는 터프한 Durocher에게는 솔직히 천사표 같은 Banks보다는 투지 넘치고 터프한 젊은 Ron Santo가 구미가 맞는 선수였다.

Durocher와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Banks가 은퇴하는 시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컵스팬들은 팀내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Banks에 대해 Durocher가 질투를 하는 것이라고 비꼬았고, Wrigley 구단주 역시 Banks의 손을 들어주었다.

팬들과 구단주의 변함없는 지지에 힘을 받았는지 Banks는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다음 시즌부터 각각 23홈런, 32홈런, 23홈런으로 Durocher의 코를 납작하게 했다.

그리고, 1970년 5월 12일 브레이브스와의 홈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8번째로 개인통산 500홈런을 쏘아올렸고, 1971년을 끝으로 19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상대투수들이 빈볼에 가까운 위협구를 던져도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보기좋게 홈런을 날렸던 Banks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매경기를 밝고 긍정적인 자세로 임했다. 팀동료들이 'Mr. Sunshine'이라고 별명을 지어줄 정도였고, 자신이 경기전에 즐겨쓰던
"What A Great day for Baseball. Let's play two." 표현에서도 경기에 임하는 그의 태도를 알 수 있다.

1977년 83.81%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 그리고 1982년에는 팀창단이후 최초로 영구결번(#14)되는
영광을 안았다. 20년 가까이 팀에 기여한 바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조치였다. 아니, 팀에 절대적 공헌을 해온 슈퍼스타와 팬들에게 실망감을 준 뒤늦은 행동이었다. 월드시리즈 무대는커녕 거의 매시즌 꼴찌나 다름없는 팀에서 자신의 젊음을 불태우는 선수를 찾기란 쉽지 않은일이다.

1980년대 초반에는 한국을 직접 방문하여 우리나라 프로야구 선수들과 경기를 펼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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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타준족의 대명사, Bobby Bonds
커브볼의 창시자 Candy Cummings(출처 : mlbb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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