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4 23:36:50, Hit : 82, Vote : 7
 Boog_Powell.jpg (101.1 KB), Download : 0
 1970년 아메리칸 리그 MVP, Boog Powell




역대 최고중 하나로 손꼽히는 신시내티의 빅레드머신 못지 않게 1960년대 후반 볼티모어의 내야진도 메이저리그 최강을 자랑했다.

그물망 같은 수비를 자랑한 팀의 리더이자 3루수 Brooks Robinson, 2루수 Davey Johnson- 유격수 Mark Belanger의 더블플레이 콤보, 그리고 100kg이 넘는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수비와 중심타선에서 맹활약한 1루수 Boog Powell 등, 이 당시 볼티모어의 내야진은 다른 팀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20승급 투수들의 선발 로테이션까지..

1970년을 전후로 해서 볼티모어를 위협할 팀은 그리 흔치 않았다.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던 좌타자 Powell은 우타자 Frank Robinson의 공격력을 보좌하며 상대투수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는데, Boog 이라는 애칭에는 '공포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도 했다.

1954년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이미 매스컴의 조명을 받은 적이 있던 Powell은 1961년 당시 19세의 나이로 시즌 막바지에 팀에 합류하게 된다. 이미 이해 마이너리그에서 30홈런, +3할, 100타점에 가까운 매서운 방망이를 과시하며 팀의 한 자리를 꿰찰 유망주로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것이다.

좌익수로 메이저리그 생활을 시작한 그는 풀타임 2년째가 되던 해에 팀의 중심타자였던 1루수 Jim Gentile과 함께 20개가 넘는 홈런을 기록하였고, 64년에는 리그 최고장타율과 커리어 최다인 39홈런으로 팀내 최다홈런을 기록하게 된다. 투고타저의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를 감안하면 훌륭한 성적이였다.

20대 초반의 덩치큰 선수가 끊임없는 성장을 계속해서 Gentile, Brooks Robinson과 함께 팀공격을 이끌어 줄 것을 구단에서는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Powell이 아닌 Gentile가 여기서 이탈하게 된다.

다저스팜의 촉망받는 1루수 출신이였던 Gentile는 Gil Hodges라는 큰 벽 때문에 다저스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볼티모어로 팀을 옮긴 경력이 있었다. 그는 1961년 한경기 2개의 만루홈런을 포함해서 한시즌동안 5개의 그랜드 슬램을 기록할 정도로 한때 최고의 주가를 날렸으나,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리고 1963년에는 독감으로 인해 팀의 원정경기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때 Powell이 대신 1루수로 출장하여 3연타석 홈런을 때리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결국, 팀은 Gentile을 포기하는 대신 Powell을 수비부담이 적은 1루수로 전향시켜 20대초반의 혈기왕성한에게 어린 선수에게 베팅을 하게 된다. 그들의 결정은 현명한 선택이였다.

▣ 1970년 리그 MVP 수상과 포스트시즌의 활약

손목부상, 무릎부상 등 두시즌에 한번꼴로 경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지만, 그것도 데뷔이후 몇 년간이었다. 신시내티에서 트레이드된 Frank Robinson이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1966년, Powell 역시 34홈런, 109타점으로 팀을 월드시리즈 정상까지 올려놓으며 향후 지속될 전성기를 예고하였다.

Earl Weaver 감독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1969년부터 3년 연속 한시즌 팀이 +100승을 기록하는 기간동안 Powell은 평균 33홈런, 110타점의 공격력으로 30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하향세를 보이던 Frank Robinson을 대신해 팀공격력을 이끌었고 특히, 1970년에는 104개의 볼넷, +4할의 출루율, 35홈런, 114타점으로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다.

단순히 성적상으로 비교했을 때 이 성적은 보스턴의 Carl Yastrzemski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였다. 하지만, 이해 보스턴은 지구 1위 볼티모어에 20경기 이상 뒤진 지구 3위에 그친 상황이었다. MVP라는 상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기자들의 생각이 대체적으로 일치했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막상 MVP 투표에서 Yastrzemski와 Harmon Killebrew등 당대 최고선수들은 Powell의 수상에 별다른 위협을 주지 못했다. 미네소타의 Tony Oliva와도 경합이 될 것으로 예상되긴 했지만,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Powell의 수상을 바라봐야만 했다.

1970년 한해만큼은 볼티모어라는 팀에 있어서 Powell이 어떤 위치에 있는 선수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시즌이었다. 미네소타와의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는 +4할 타율, 1홈런, 6타점을, 신시내티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1,2차전 연속홈런으로 팀 우승에 기여를 하게 된다. 여러가지 점을 보건데 그의 MVP 수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팀의 선발투수 4명이 20승 기록한 1971년에도 Powell은 오클랜드와의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 2차전에서 Catfish Hunter를 상대로 2개의 홈런을 뽑아내는 매서움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피츠버그와의 월드시리즈에서 그의 방망이는 침묵했고 팀역시 3년간 지켜온 패권을 'Moustache Gang' 오클랜드에게 내주며 재정비에 들어갔다.

2년동안 부상으로 시즌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Powell은 1974년 시즌이 끝난 후 마이너시절 포함해서 15년동안 정들었던 Memorial Stadium(당시 볼티모어 홈구장)을 떠나 팀동료였던 Frank Robinson이 감독으로 부임한 클리블랜드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1975년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감독이 된 Robinson을 축하라도 해주듯이 Powell은 지난 몇년간의 부진을 떨치고 다시 한번 홈런포를 가동, 26홈런을 기록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리고 1977년 다저스에서의 생활을 끝으로 통산 339홈런, 1,187타점의 성적을 남긴 상태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볼티모어의 팀역대 공격부문에서 당연히 그의 이름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을만큼 볼티모어의 황금기 시절 그가 기여한 바는 상당히 크다 할 것이다. 최근까지 볼티모어의 홈구장 캠든야드에서 바베큐 코너를 운영한다고 하는데, 그 인기가 상당하다고 한다.




Name
Memo      


Password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비운의 투수 Don Wilson
호타준족의 대명사, Bobby Bonds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