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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r. Dodger' Steve Garvey


<사진출처 : dodgers.com>

브루클린 시절 다저스는 Roy Campanella-Duke Snider-Gil Hodges로 구성된 매서운 공격력을 자랑한 팀중 하나였다. 하지만, 뉴욕을 떠나 지금의 Chavez Ravine 즉, 다저스 구장에 정착한 이후부터는 리그 최고를 자랑한 공격력이 한동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투구타저의 시기까지 맞물리면서 다저스의 공격력은 리그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1960년대 초반 월드시리즈 우승의 원동력도 공격력보다는 최고의 투수진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였다. 그러나, 투수진에 의존한 팀전력도 Sandy Koufax, Drysdale등이 은퇴한 후로는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그 결과 1967년부터 5할승률도 기록하지 못한채 2년 연속 리그 하위권에 쳐지고 말았다.

대대적인 체제 전환이 필요한 시기였다. 체제 전환의 한 일환으로 다저스는 1968년 유망한 신예들을 무더기로 영입하였다. 1965년 도입 이후 4회째를 맞는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전체 4순위로 지명된 유망주 Bobby Valentine(前 메츠, 보스턴 감독)을 필두로 하여 Ron Cey, Bill Buckner(1986년 월드시리즈 알까기의 주인공), Davey Lopes등 1970,80년대 메이저리그를 풍미한 인물들이 LA로 집결했고, 그리고 Gil Hodges와 함께 다저스 역사상 최고의 1루수로 평가받는 Steve Garvey 역시 1968년 4라운드로 어릴적부터 희망하던 팀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Garvey가 중심이 된 다저스의 공격력은 Dusty Baker(現 워싱턴 감독), Reggie Smith 등이 영입된 1970년대 중반에는 1950년대 브루클린 시절 못지 않은 화려한 타선을 자랑하며 리그를 재패하였다.


▣ Mr. Dodger의 탄생

플로리다 출신인 Garvey는 어린 시절부터 다저스와의 인연을 맺어왔다. 다저스는 스프링캠프를 플로리다에서 매년 보냈는데, Garvey의 아버지는 다저스 선수들의 이동을 책임지는 버스기사로 자원봉사를 하게 되고 Garvey는 배트보이로 활동하면서 유명한 스타들과 짧은 기간동안 동거동락을 하는 행운을 잡았다.

Duke Snider 등 대선수들로부터 개인적인 지도까지 받은데다가 타고난 재능, 꾸준한 노력 등으로 Garvey는 리틀야구시절 투타에서 3차례의 노히트와 8할의 타율 등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고, 고등학교에서도 3루수와 풋볼팀 쿼터백으로 명성을 쌓았다.

고교 졸업후 미네소타에 지명되었지만 내심 다저스에 입단하길 원하고 있던 그는 대학으로 진학하여 몇년후에 다시 드래프트에 참여하게 되고 1968년 마침내 다저스와 4만$의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기까지는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릴 적부터 줄곧 3루수로 활약한 그는 프로입단이후 수비에서 많은 헛점을 노출했다. 수비반경이 좁은데다가 송구에서도 미숙함을 보여 1루수가 베이스를 제대로 밟지도 못한채 공을 잡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대학시절 풋볼경기에서 다친 오른쪽 어깨와 수술이 그 이유였다.

1970년으로 접어들면서 빅리그에서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코칭스텝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90%의 성공률을 가까스로 넘는 그의 수비로 팀의 핫코너를 맡기기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입단동기인 또 한명의 3루수 Ron Cey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Garvey의 팀내 위치에 대한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1972년 시즌이 끝난 후 6년 연속 골든글러브에 빛나는 팀의 1루수 Wes Parker가 부상과 부진을 이유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Walter Alston 감독은 이듬해 Bill Buckner를 시즌초반 1루수로 잠시 기용하다가 6월 하순 Garvey를 마침내 1루수로 전환시키고 Ron Cey를 3루수로, 유격수에는Bill Russell(前 다저스 감독), 2루수에는 Davey Lopes(현 워싱턴 1루 코치)을 기용하여 20대의 젊은 선수들로 내야진을 구성하였다.

메이저리그 最長, 최강을 자랑한 내야진이 탄생
한 것이었다. 이 내야진은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약 9년 가까이 존속하며 다저스의 전성기를 이끈 주축들이였다.

한편, 1974년부터 팀의 주전 1루수로 시즌을 시작한 Garvey는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데뷔 이후 최초로 200안타고지를 점령했고 21홈런, 111타점으로 이해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였다. 처녀출전한 올스타전에 서 4타수 2안타를 기록, 동점을 이끌어낸 득점과 결승타점을 만들어 올스타전 MVP까지 자신의 품으로 가져왔다.

그의 무서운 기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피츠버그와의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 4차전에서 2홈런, 2개의 단타로 혼자서 4타점을 올려 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기여하게 된다. 'Mr. Dodger' Steve Garvey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여기에 1976년 시즌중반부터 팀의 3루 주루코치이자 마이너리그 시절 지도자였던 Tommy Lasorda가 Alston으로부터 지휘봉을 넘겨받자 그의 성적은 더욱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977년에는 33홈런, 115타점으로 이부문 커리어 최고를 기록했고, 자신을 비롯하여 팀동료 Ron Cey, Dusty Baker, Reggie Smith가 나란히 +30홈런을 쏘아올려 브루클린 시절의 옛 영광을 재현하였다.

하지만, 아쉬운 것도 있었다. 이해 Garvey는 평소 부족하다고 지적을 받아왔던 장타력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둔 반면 시즌 200안타와 3할타율에 아깝게 실패하여 7년 연속 +200안타, +3할의 연결고리를 이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명실상부한 다저스의 최고스타였다. 신사적인 매너와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로 수많은 어린팬들과 여성팬들을 몰고 다녔고, 팬들의 무차별 사인공세에도 하나하나 사인을 해주면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1978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Steve Garvey Junior High School'(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매년 각종 주요행사에 Garvey는 VIP 0순위로 초청받고 있다)까지 설립되었다.

Roberto Clemente Award, Lou Gehrig Award를 포함하여 야구와 관련없는 부문에서도 각종 상을 수상하였다. 성적이 기복없이 꾸준한데다가 사회문제 등과 관련된 정치적인 발언들도 꺼리지 않았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여 그는 우리나라에서 쓰는 무결점의 100% 산소미인(?) 이라는 용어가 딱 들여맞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Mr. Dodger'라는 별명외에도 'Mr. Perfect' , 'Mr. Consistency' , 'Mr. Senator '등 화려한 수식어들이 따라다녔다.

일부에서는 그가 20년후에 미국 대통령까지 될 것이라며 말했고, Tommy Lasorda는 Garvey에게 대통령이 되면 자신에게 장관자리 하나를 부탁한다는 농담섞인 얘기를 하기도 하였다. Garvey 자신도 평소 지인들에게 정치에 뜻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은퇴 이후 상원으로 진출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Steve Garvey의 이면

그러나, 그에겐 팬들이 모르는 숨겨진 면들이 있었다. Garvey는 선수시절 팀동료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는 다소 이기적이였다는 평가를 들었는데 팀웍보다는 개인성적과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매스컴을 통해 자신의 장점만을 부각시키려 했고, 팀동료들 사이에서는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매너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팀을 이끌만한 리더로서의 카리스마도 그에게서 찾기 힘들었다. 일부 팀동료들은 일부 언론과의 비공식 인터뷰에서 "Garvey는 겉과 속이 다른 사기꾼" 이라며 비난을 했고, 투수인 Don Sutton 역시 지역신문을 통해 "팬들이 속고 있다"고 그의 이중적인 태도를 꼬집었다. Sutton의 인터뷰로 1978년 여름 뉴욕 원정경기에서 Garvey와 Sutton은 클럽하우스에서 치고받는 몸싸움을 벌였고, 팬들도 조금씩 Garvey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Garvey는 아내 Cindy와 관련해서 Sutton이 먼저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싸움이 일었다고 훗날 이에 대해 언급을 하였다.

여기서 Garvey부부와 관련된 얘기를 간략하게 하고자 한다.
Cindy Truhan은 지역방송국의 인기있는 프로그램 진행자였고, Garvey 역시 스타선수였기 때문에 이들 부부의 사생활이 찍힌 사진들은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 미시건 대학시절에 만난 Garvey와 Cindy는 2명의 자녀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고 결별에 이어 결국 이혼까지 하였다.

Garvey의 주체할 수 없는 여성편력이 원인이었다. Garvey는 자신의 비서와 내연의 관계를 맺었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제2, 제3의 여자와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부 언론은 공개적으로 밝혀진 그의 여자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보도를 하기까지 있었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이혼소송과 양육권문제 등으로 그는 연봉의 대부분을 소송비와 양육비로 써야했고, 이후에도도 첫번째 부인 Cindy와이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 그리고 또 다른 여자에서 출생한 자녀의 양육비까지 책임지는 이중고를 겪었다.
어떤 이는 미국 각州에 Garvey의 자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라며 우스갯 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의 완벽한 이미지가 조금씩 실추되면서 실망한 팬들도 적지 않았지만, 성적으로 메워나가기에 충분했다. 1978년 올스타전에서 3루타 포함, 3타수 2안타, 2타점으로 생애 2번째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며 총 10차례의 올스타 무대에서 4할 타율, 9할대의 장타율을 기록하였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평균 25홈런, 100타점, 3할타율의 전성기를 구가한 Garvey의 활약은 포스트시즌, 특히 리그 챔피언쉽(이하 LCS)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1978년 필리스와의 LCS에서 1차전 2개의 홈런을 포함하여 총 4홈런, 7타점으로 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에게 무릎을 꿇긴 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도 3할의 타율로서 Reggie Jackson 못지 않게 가을의 사나이라 불릴만 했다.

그리고, 1982년 시즌 종료후 팬들의 아쉬움과 비난이 교차한 가운데 FA계약을 맺고 샌디애고로 이적한 뒤 1984년 컵스와의 LCS에서도 가공할 만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당시 샌디애고는 Garvey를 비롯하여 1970년대 후반 최강 양키스의 주장이었던 3루수 Graig Nettles, 강속구 클로저 Goose Goosage를 영입하여 한층 전력을 강화했고, 젊은 신예 Tony Gwynn의 타격왕 등극으로 팀창단 이후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상황이였다.

그러나, 컵스에게 1,2차전을 내리 내주고 벼량끝에 몰린 샌디애고는 3차전에서 기사회생하였고, 4차전에서는 9회말 5 :5 동점인 가운데 Garvey가 상대마무리 Lee Smith를 상대로 2점짜리 끝내기 결승홈런을 쏘아올려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마지막 5차전에서는 5타수 4안타로 팀이 기록한 6득점중 혼자서 5타점을 만들어냄으로써 또 한번 시리즈 MVP를 수상하게 된다. 총 5차례의 리그 챔피언쉽에서 생산한 8홈런, 21타점은 1969년 양대리그에 LCS가 도입된 이래 오늘날까지 최고성적으로 남아있다.

그의 화려한 야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5년 9월 3일부터 시작된 연속경기출장은 1983년 4월 16일 친정팀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컵스의 Billy Williams가 가지고 있던 리그기록을 뛰어넘어 1983년 7월 29일까지 지속되어 이 부문 역대 4위에 해당하는 1,207경기 연속출장의 쾌거를 올렸다.

또한, 샌디애고 시절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골든글러브 4회에 빛나는 수비수답게 193경기 연속 무실책과 1루수 통산수비율(.996) 기록을 쏟아냈다.

1987년 시즌종료후 Garvey는 친정팀 다저스로 다시 복귀할 의사를 밝혔지만, 부상과 체력저하로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화려한 야구인생을 마감하였다.

샌디애고에서는 1989년 팀내 최초로 영구결번(#6)되었으며 은퇴이후 각종 사회사업을 비롯하여 개인사업에 매진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목표란 모름지기 거의 이룰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큰 노력이나 생각 없이도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한다면 자신의 진정한 재능과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 Steve Garv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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