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5 14:53:13, Hit : 80, Vote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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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루타 제조기 'Wahoo' Sam



<사진출처 : 명예의 전당>


1880년 네브라스카주의 Wahoo라는 지역에서 태어난 Sam Crawford는 프로야구 선수의 길을 택하기 전에는 이발사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이발소 보조로 일하기도 했지만, 고향 야구팀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좀더 안정적이고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야구선수의 길로 전향하게 된다.

1899년 65$의 월급을 받으며 캐나다리그의 프로팀을 시작으로 2,3개팀을 한해동안 옮겨다녔고 이해 9월 신시내티 레즈를 최종기착지로 삼고 메이저리거로서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더블헤더로 치뤄진 데뷔전에서 8타수 5안타의 성적으로 신고한 그는 Dead ball시대에 적합한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를 양산하며 신인시절부터 많은 2,3루타를 기록하였고, 1901년에는 홈런 16개로 홈런타이틀을 차지하였다.

빠른 발과 최고의 주루능력를 갖고 있던 그를 탐내는 여러 팀이 생겨나기 시작할 즈음에 내셔널리그(NL)와 아메리칸 리그(AL)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협정으로 인해 Crawford는 4년간의 신시내티 선수생활을 접고 디트로이트로 팀을 옮기게 된다.

연봉상한선 철폐 등 NL의 수많은 스타급 선수들을 영입하며 NL과의 경쟁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둔 AL은 백기를 들고 먼저 손을 내민 NL과 1903년 1월 신시내티에서 양리그의 평화적 공존을 약속하였다.

당시 Crawford는 3천$의 연봉을 제안한 디트로이트를 마다하고 150$의 월급으로 신시내티에 계속 남길 원했지만, 이 시기는 노예문서나 다름없는 보류조항 등으로 구단주들의 힘에 의해 선수들의 팀이적이 이루어진 시대였고, 양리그의 전쟁이 AL의 승리로 끝난 상황이였기 때문에 Crawford가 신시내티에 계속 머물기엔 버거운 실정이였다. 결국 홈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시내티는 미래의 쿠퍼스타운 멤버를 잃게 되고 말았다.

Crawford는 이적 첫해인 1903년 25개의 3루타로 이부문 1위를 기록하며 단숨에 팀의 간판타자로 떠올랐고, 1904년 5월 11일에는 Cy Young의 24 1/3 연속이닝 노히트 경기에 마침표를 찍게 했다(Cy Young의 노히트 행진은 4월 25일 구원 2이닝, 4월 30일 구원 7이닝, 5월 5일 9이닝 퍼펙트 vs A's의 Rube Waddell), 5월 11일 7 1/3이닝)..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디트로이트는 그렇게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1907년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Hughie Jennings가 지휘봉을 잡으면서 강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Jennings는 20살의  약관 Ty Cobb을 주전 중견수로 과감히 기용하며 우익수인 Crawford와의 보이지 않는 경쟁을 만들었다.

나이상으로 7살이나 어린 Cobb이었지만,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어지간했던 Cobb과 Crawford는 10여년동간 같은 팀동료로 활동하면서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한다. Cobb이 매경기를 살아남기 위한 전쟁처럼 생각했던 반면 Crawford는 다소 낙천적인 성격으로 경기를 즐겁게 하려고 했다. 대조적인 성격이다 보니 당연히 사이가 그렇게 좋을리는 없었다.

단, 경기중에는 일부 예외였다.
주로 Cobb이 3번타순을, Crawford가 4번 타순을 쳤는데, Cobb이 일단 진루하면 이 둘은 서로 눈으로 작전을 교환하며 상대 내야진을 유린하였다. 예를 들어 Cobb이 안타와 도루 등으로 3루에 있는 상황이고, 타석에 Crawford가 있는 경우가 있을 경우가 종종 있었다. 상대 투수가 Cobb과 비교해서 전혀 꿀릴 게 없는 타격을 보유한 Crawford를 정면승부를 할 리가 만무했다.

결국, Crawford가 1루에 볼넷을 얻어 출루하는 동안 Cobb은 3루베이스에서 조금씩 떨어지며 예상밖의 홈쇄도를 시도하려 했고, Crawford는 이 상황을 틈타 2루베이스를 훔치기 위해 모션을 취했다. Cobb이 홈으로 질주를 하면 Crawford 역시 동시에 2루로 뛰기 시작하는 식이였다. 만약 2루에 Cobb이, 1루에 Crawford가 있으면 거의 90% 이상은 이 두명이 합작하는 더블스틸 작전이 이루어졌다.

주루센스 하나만큼은 최고였던 이들의 플레이에 상대 내야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경기장에서 호흡을 맞췄던 것에 대한 배려였는지 Cobb은 훗날 Crawford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경쟁은 성적향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Crawford와 Cobb은 1907년부터 3년 연속 팀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켰고, 특히 Crawford는 1908년 7개의 홈런으로 신시내티 시절에 이어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 메이저리그 최초로 양대리그에서 홈런왕을 거머쥔 선수가 되는 영광을 안게 된다.

1911년에는 커리어 최고인 타율.378을, 1914년에는 역시 커리어 최다이며 통산 타이기록인 26개의 3루타(여전히 AL 기록)로 개인통산 6번째 3루타 1위를 차지함으로써 3루타 부문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였다.

1917년을 끝으로 Harry Heilmann이라는 또 한명의 스타에게 우익수 자리를 내주고 은퇴한 그는 통산 3천안타에 약 35개정도가 모자른 상태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309개의 통산 3루타와 1901년 기록한 단일시즌 12개의 그라운드 홈런(inside-the-park home run)으로 이 부문 1위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1920년대 캘리포니아 지역에 정착하며 이곳의 독립리그에서 잠깐 선수로 활약한 뒤 주로 심판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6년간 USC의 야구감독으로 재직하면서 대학 야구명문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 대단하여 1957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헌액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이름앞에 반드시 Wahoo라는 표기를 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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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k Sauer, 31세에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다.
'Mr. Dodger' Steve Garv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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