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5 21:38:05, Hit : 74, Vote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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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최고의 왼손투수 Lefty Grove




1920년을 전후로 해서 공의 반발력이 없던 소위 'Dead Ball'시대가  마감을 했다. 투수들에게 유리한 시대가 끝나면서 이제는 타자들이 활개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타자들이 가장 기를 펴고 다녔던 시기가 1920,30년대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기 때문에 당연히 투수들에겐 힘든 시기였다.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 등 투수의 능력을 판단하는 표면적인 수치에서도 이 시기 투수들의 성적은 다른 시대와 비교해서 많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1930년대 투수들의 개인적 능력이 결코 뒤쳐진다는 얘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타자들에게 유리한 공의 생산과 시즌을 거듭할수록 낮아졌던 마운드 높이가 투수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서, 이 당시 투수 중 화려한 성적을 기록한 투수들을 찾는다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단 한명의 투수가 군계일학의 피칭을 선보였다. 그의 이름은 바로 불같은 강속구의 소유자 Lefty Grove..

Grove는 Dead Ball 시대가 마감한 이후1930년대 활약한 투수중 유일하게 통산 300승을 기록했고,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고 칭송받는 Walter Johnson도 5차례밖에 차지하지 못한 리그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무려 9차례(역대 1위)나  독식하는 경이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승률, 탈삼진에서도 양키스의 Lefty Gomez 등장전까지 리그를 완전히 지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정방어율에서도 그는 Sandy Koufax, Warren Spahn, Steve Carlton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좌완투수로 선정될 정도로 실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1900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Grove는 자신의 삶을 힘들게 했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일찌감치 프로생활에 뛰어들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손보다 큰 돌멩이를 던지면서 어깨와 팔의 근력을 키운 덕택에 그의 강속구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던 것은 아니였다. 너무 빠른 그의 공을 받아줄 포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지션을 1루로 바꾸는 노력도 했으나 마운드에서와는 달리 타석에서는 형편없는 실력이 드러나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투수로 전향하게 된 것이다. Babe Ruth가 보스턴 입단 전에 활약하기도 한 Baltimore Orioles(당시 마이너리그 팀)에 1917년 입단하여 1920년부터 리그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5년 연속 탈삼진, 다승왕,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석권하며 소속팀을 5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으로 이끌었다.

종종 펼쳐지는 메이저리그 팀과의 시범경기에서도 그의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특히, 최고의 타자인 Ruth를 상대로 위협구도 마다하지 않는 배짱을 선보였고, 11차례의 대결에서 9번이나 Ruth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괴력을 발휘했다.

당연히 그의 실력에 감탄한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들이 스카웃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Grove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팀의 구단주는 모든 제의를 뿌리쳤다. 강속구 하나만큼은 Walter Johnson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를 받은 Grove를 데려가기 위한 스카웃 전쟁은 계속되었다.

최고의 투수를 영입하려는 치열한 전쟁에서 볼티모어의 구단주 Jack Dunn은 1924년겨울 마침내 손을 들게 된다.  필라델피아 A's의 구단주 겸 감독인 Connie Mack이 $100,600을 Grove의 몸값으로 제시한 것이다. 1920년 양키스가 Ruth를 데리고 갈때 보스턴에게 줬던 10만$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고,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의 몸값이었다.

마이너에서 5년이 넘는 기간동안 112승을 쌓고 25살의 다소 늦은 나이에 마침내 빅리그에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1925년 신인 첫해 부상으로 제구력 불안이 이어져 기대만큼의 성적은 거두진 못했지만, 리그 최다 탈삼진을 차지하며 강속구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Grove가 좀더 일찍 메이저리그에 진입했다면 400승과 3000탈삼진도 가능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있다. 데뷔 첫해부터 최다 탈삼진은 7년연속 그의 독차지였고, 1927년부터는 다승, 방어율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1927년 여름에는 2차례나 공 9개로  타자 3명을 모두 삼진잡는 모습을 보이더니 생애 첫 20승을 기록했고, 리그 평균방어율과는 최소 2.0 이상,  리그 방어율 2위를 기록한 투수보다는 최소 0.3 이상 차이나는 2점대 방어율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시작했다. 1999년, 2000년에 보여준 Pedro Martinez의 전성기 시절 성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것 같다.

1930년부터는 Grove 전성기의 절정이었다. 매시즌 20승 이상은 물론이고, 1931년에는 31승을, 그리고 1930년 7월 25일부터 1931년 9월 24일까지 46승 4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올려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월드시리즈에서의 활약은 말할 것도 없다.

1931년에는 Waltet Johnson, Joe Wood가 1912년에 수립한 16연승에 도전하여 8월 19일 타이기록을 수립했고, 다음 등판 경기였던 세인트루이스 Browns(現 볼티모어)에서 아메리칸 리그 최다인 17연승 달성 일보직전까지 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수비실책으로 비자책 완봉패를 당하면서 새로운 기록 달성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팀의 주전 좌익수인 Al Simmons가 부상 검사를 위해 결장하게 되자 신인선수인 Johnny Moore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는데, 대기록 달성에 부담감을 느낀 Moore가 평범한 외야플라이를 놓치면서 주자가 득점, 결국 Grove가 패전투수가 되고 만 것이다. 이에 격분한 Grove는 경기가 끝난후 라커룸에서 난동을 부렸다.

Mack 감독도 두손두발 다 들 정도로 엄청난 다혈질의 소유자였으니 그의 행동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협구를 던져도 상대팀 타자들이 주눅드는 투수였고,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선수였다.  입단 동기인 포수 Mickey Cochrane을 비롯한 극히 일부 선수만이 Grove의 말상대가 될 정도였다.

일반적인 강속구 투수들처럼 Grove도 젊은 시절 제구력이 좋은 편은 아니였다. 공의 빠르기는 Walter Johnson, Satchel Paige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 공을 상대하는 타자들은 타석에 들어서면서부터 으레 겁을 집어먹었다고 한다. 제구력이 불안한데도 그는 몸쪽 승부를 전혀 피하지 않았고, 고의인지 아니면 제구력의 부족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가끔씩 타자들의 머리쪽으로 공을 던졌고, 이러한 투구때문에 'Head Hunter'라는 별명까지 따라다녔다.

1930년대 리그 우승 3연패를 한 이후 Mack 감독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Grove는 1933년을 끝으로 팀을 옮기게 된다. 여러팀에서 그를 잡기 위해 나섰지만, 보스턴의 Tom Yawkey 구단주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스턴을 상대로 Grove가 두차례나 10연승 이상을 기록했고, 보스턴의 홈구장인 Fenway Park에서는 24연승을 할 정도로 보스턴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1934년 보스턴에서의 첫해는 부상으로 주춤하다가 1935년 생애 8번째이자 마지막 20승을 달성하여 구단주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하지만, 30대 후반으로 접어들자 예전의 그가 아니였다.

강속구를 10년 넘게 뿌린 나머지 그 위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20대 초반에는공 10개를 던지면 9개 정도가 강속구였고, 메이저리그 데뷔이후로 4,5년간 커브볼을 구사하긴 했지만, 그가 나중에 회고하면서 밝혔듯이 당시 커브볼의 각이 마음먹은 대로 꺽이지 않아 변화구를 안 던지고 빠른볼만 무식하게 던졌기에 팔이 지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투구수 관리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였다.

기교파 투수로 변했다고는 하지만, Grove는 여전히 팀내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투수였다. 물론, 성격은 신뢰할 수준이 아니였겠지만 말이다. Connie Mack 감독은 보스턴에 던지는 Grove의 투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진정한 투구(Pitch)를 하는군, 내가 데리고 있을 때는 던지기(Throw)만 하더니.."

강속구를 잃어 버린 보스턴 시절에도 4차례나 평균자책점 리그 1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그가 과연 어떤 투수였는가 짐작이 갈 것이다. 1941년 7월 25일 클리블랜드와의 홈경기에서 통산 300승을 기록한 후 몇차례 경기에 더 등판했으나, 승수를 쌓는데는 실패하였고, 이해를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투수로서 이룩할 수 있는 것(1930, 1931년 : 트리플 크라운, 1931년: 리그 MVP)은 거의 대부분 달성했고, 상대팀들의 연승과 선수개인의 연속기록에 제동을 거는 특급투수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양키스의 309경기 연속 득점에 제동을 걸며 완봉을 거둔 투수가 바로 Grove였으며, 1925년 George Sisler의 35경기  연속 안타에 제동을 건 투수도 바로 그였다. 이렇듯 1930년대  최고의 투수라는 명성은 1947년 76.40%의 득표율로 헌액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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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3천 안타 Cap A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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