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6 11:42:29, Hit : 71, Vote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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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배팅 컨트롤 Rod Carew




1960년대 미네소타는 리그 최고의  슬러거중 한명인 Harmon Killebrew와  5툴 플레이어 Tony Oliva가 주축이 되어 팀공격을 이끌고 있었다. 여기에 리그 최고의 컨택트 히터인 Rod Carew가 1967년부터 팀에 합류하면서 미네소타는 이 3명의 선수가 함께 활동하던 1970년대 초반까지 리그 정상급의 공격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파나마의 빈민촌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가정부 일을 하며 집안을 꾸려나가던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Carew는 15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어린시절 크고 작은 병치레를 많이 해서 몸이 약했던 그는 야구선수 출신이였던 외삼촌으로부터 야구를 해 볼것을 권유받았고, 뉴욕의 빈민가에서 정착을 한 이후에도 꾸준히 야구연습을 하며 프로선수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196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팀의 입단제의끝에 5천불의 계약금을 제시한 미네소타의 옷을 입은 Carew는 약 2년간의  마이너 수업을 받은 후 1967년 팀의 2루수로 빅리그에 데뷔를 하게 된다.

당시 리그에서 잘 나가던 투수들이였던 Dave McNally와 Denny McLain으로부터 자신의 메이저리그 1호 안타와 1호 홈런을 각각 기록한 그는 탁월한 운동신경을 가진 덕분에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하루 일과가 끝난 한밤중에도 혼자서 거울앞에 서서 타격 연습을 할 정도의 노력파였다.

이러한 노력은 1967년 리그 신인상 수상으로 보답을 받게 된다.
이듬해 68년 2년차 징크스로 전년도 타율.292에서 2할 7푼까지 떨어졌지만, 이것으로서 부진은 끝이었다. 69년 타율.332를 시작으로 1983년까지 15년 연속 3할타율을 기록하며 당대 최고의 타격머신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마이너시절 감독이였던 Billy Martin으로부터 강한 승부근성과 주루플레이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1969년에는 한 시즌 7개의 홈스틸을 성공시키며 1912년 8개의 홈스틸을 성공시킨 Ty Cobb에 이어 이부문 역대 2위의 성적을 남겼다.

이러한 성공길에 장애물이 없던 것은 아니였다.
1970년 사이클링 히트까지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수비도중 상대팀의 주자와 충돌하며 오른쪽 무릎연골이 찢어지는 큰 부상으로 6월을 끝으로 시즌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기전 러시아계 유태인 여성과의 결혼으로 매스컴은 물론 팀동료들로부터 이유없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팀원과 보이지 않는 불화가 생기기도 하였다. 당시 흑백갈등이 심했던 터라 일부 백인우월단체로부터 살해협박까지  받아가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어려움은 인내를 갖고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먼저 팀동료들과 쌓였던 장벽을 허물려고 노력을 했고, 1971년에는 단 한 개의 홈런도 없이 타격왕을 거머쥐는 진기한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1972년부터 75년까지는 Carew의 전성기였다. 3차례나 3할 5푼을 넘기며 4년 연속 리그 타격왕을 독식하였고, 1976년에도 George Brett과 Hal McRae에 이어 2리 차이로 리그 타격 3위를 기록하였다.
마지막 경기에서 무안타에 그치지만 않았더라면 5년  연속 타격왕도 가능한 시즌이였다.

Carew는 공을 맞추는 컨택능력이 탁월했고 좌타자라는 이점을 살려 기습적으로 행한 번트는 상대 수비를 항상 긴장하게끔 했다. 5차례나 5안타 경기를 기록했고, 한경기 4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한 것은 57차례나 될 정도로 배팅 컨트롤은 모두가 인정한 Carew의 주특기였다.

미네소타의 감독이었던 Frank Quilici는 "Carew는 어떠한 공이 들어오더라도 자신의 배트에 맞추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고, 상대 투수가 빠른 볼을 갖고 있는 투수면 거기에 맞는 타격폼으로 전환하면서 완벽한 컨택트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단타를 2루타로, 2루타를 3루타로 만들 수 있는 놀라운 주루능력과 영리함을 가진 완벽한 선수다. 그의 배팅컨트롤은 어떤 선수도 따라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있다" 라며 극찬하였다.

이와 같은 배팅능력에 수비까지 완벽했더라면 역사상 길이 남을 2루수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공격과 달리 2루수로서의 Carew는 리그 평균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격에 좀더 많은 비중을 두기 위해 75년부터는 1루로 전향하였고, 수비부담에 대한 완화로 도루에서도 좀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며 한시즌 최고 49개를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1976년 아깝게 타격왕 등극에 실패하자 1977년에는 시즌 초부터 독보적인 실력으로 생애 6번째 리그 타격왕 도전에 시동을 걸었다. 결과는 239안타, 타율.388, 14홈런, 128득점, 100타점...
전부문 개인 최고의 한해를 보냈고, 타율과 최다안타 역시 미네소타 팀 역대 최고기록으로 작성하며 리그 MVP를 거뜬히 수상했다. 7월까지 유지했던 타율 4할에 실패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듬해 1978년 타율.333으로 다시 타격왕을 차지, 생애 7번째 타격왕에 등극하며 Ty Cobb, Honus Wagner, Tony Gwynn에 이어 가장 많은 타격왕을 차지한 선수가 된다.

Killebrew와 Oliva가 은퇴한 이후 Carew는 명실공히 미네소타를 대표하는 간판선수였고, 팀의 리더로서 손색없는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Calvin Griffith 구단주는 그에 맞는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결국, Carew는 1979년 2월 12년간 입었던  미네소타의 유니폼을 벗고 에인절스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다.

이적 첫해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6주간의 초반 결장에도 불구하고 3할이 넘는 타율과 자신의 명성에 맞는 출루율 등으로  에인절스가  팀창단 이후 첫번째 지구우승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3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주루 플레이에서 예전과 같은 민첩함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배팅 컨트롤의 마법사 답게 1983년에는 5월말까지 5할 타율을 유지하며 이해 타율.339로 당시 팀 프랜차이즈 최고타율을 기록하였다

1985년 8월 4일 친정팀인 미네소타를 상대로 통산 3,000안타를 달성한 후 은퇴를 하게 된다. 선수시절 단순히 야구뿐만 아니라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봉사활동으로 Roberto Clemente 상을 수상(1977년)하였고, 이민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67년부터 1984년까지 18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 1970년대 최고의 스타선수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1991년 헌액자격이 주어지는 첫해에 당시로는 외국인 선수 중 최고득표율인 90.52%로 헌액된 Carew는 미네소타와 에인절스 두팀에서 모두 영구결번(#26)될 정도로 이 두팀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90년대 중반 에인절스의 타격코치를 거쳐 2001년에는 밀워키의 타격코치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이해 밀워키의 타자들이 무려 1,366개의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삼진을 당하면서 조금은 머쓱한 경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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