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6 21:20:08, Hit : 72, Vote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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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투수 겸 배우, Rube Marquard




1910년대에 활약하던 것을 감안하건데, Rube Marquard의 통산성적 201승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는조금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최근까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다른 투수들과 종합적으로 비교해 보더라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1971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헌액이 되었을때에도 쿠퍼스타운의 회원이 되는 것에 대해 냉소적인 견해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Marquard가 헌액될 수 있었던 것은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뉴욕 자이언츠를 3년 연속 월드시리즈 무대로 이끌었고, 이밖에도 브루클린 등 이적한 팀에서도 소속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기여한 점을 그 어떤 것보다 높이 평가한 것이다.

1889년 클리블랜드의 한 시골동네에서 태어난 그는 기술자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야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06년 클리블랜드의 한 프로팀이었던 Waterloo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으려하자 아버지는 Marquard에게 부자의 연을 끊을 것이라며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집에서 거의 쫓겨난 상태에서도 그는 돈과 명예를 얻겠다는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한 결과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감독이 계약에 난색을 표하면서 프로팀 입단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적당히 갈곳도 없어 결국에는 아버지에게 이틀간 무릎꿇고 용서를 빈 끝에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스크림 회사의 직원로 일하면서도 한번 시작한 야구를 그만둘 수는없었다. 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던 야구팀에서 $25의 급여을 받으며 운동를 계속하였고, 이후 American Association의 Indianapolis와 $200의 월급을 받는 조건으로 프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빠른볼과 변화구가 뛰어났던 Marquard는 그곳에서 다승왕과 최다탈삼진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팀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그의 투구를 지켜본 한 신문기자가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투수 중 한명이었던 필라델피아 A's의 좌완 Rube Waddell과 비슷한 체격과 투구폼을 가졌다는 기사를 쓰면서 본인의 이름 대신 'Rube'(시골출신이여서 촌뜨기라는 의미로도 Marquard를 Rube라고 불렀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에게 입단제의를 한 팀은 뉴욕 자이언츠였다. John McGraw감독은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 계약금인 $11만을 제시하면서 1908년 18세의 그를 입단시켰다.

하지만, 데뷔 첫 3년간은 암흑기였다.
데뷔경기에서는 4연속 사사구를 내주며 대량실점 했고, 이후에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팀의 간판투수 Christy Mathewson과 듀오를 이뤄 마운드를 이끌어 줄것을 예상한 McGraw감독은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던 중  투수코치였던 Wilbert Robinson의 도움으로 커브와 투구폼을 수정하자 Marquard는 새롭게 태어났다.

전년도 4승에서 이듬해 1911년 단숨에 24승으로 정규시즌 팀우승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237개의 탈삼진으로 리그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A's와의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Frank Baker에게 2점홈런을 허용, 'Homr-Run Baker' 탄생의 빌미를 제공하긴 했지만, 이전의 부진을 떨치고 팀성적에 기여한 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였다.

1912년은 Rube Marquard의 전성기였다.
개막전인 4월 11일 브루클린을 상대로 첫 승을 신고하더니 이후 경기에서 한차례의 패전도 없이 7월 2일까지 19승 무패, 19연승의 대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1930년대 Carl Hubbell이 두시즌을 거쳐서 24연승을 한 기록이 있긴 하지만, 한시즌에 19연승을 한것은 오늘날까지 불멸의 기록중 하나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20연승도 가능했다는 점이다.
한차례 구원등판해서 승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규칙에 의해 연승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였다. 아무튼 그의 연승기록은 7월 8일 컵스와의 경기에서 7-2로 패하면서  마침표를 찍었다. 상대투수는 34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고 있던 Jimmy Lavender 라는 신인투수였다.

이와 같은 연승행진에 힘입어 Marquard는 시즌 26승으로 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은 물론 보스턴과의 월드시리즈에서도 혼자서 2승을 올리며 우승에 기여를 하였다.

외향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는 시즌이 끝난후에는 보드빌(Vaudeville : 뮤지컬의 일종으로서 춤과 노래등으로 사회풍자)등 연예무대로 진출하여, 상당한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고 한다. 여배우들과의 염문도 심심치 않게 뿌리고 다녔고, 당시 최고의 보드빌 배우였던 Blossom Seeley와 결혼하여 오프시즌중에는 여러 지역을 돌며 보드빌 공연을 펼쳤다.

자신이 직접 만든 춤과 노래로 연기가 무르익었던 시절에는 야구장에서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야구에 좀더 매진하기를 원했던 McGraw감독은 이런 Marquard를 탐탁치않게 여겼다.

1913년에도 23승을 기록하며 뉴욕 자이언츠의 전성기를 계속해서 이끌었지만, 이듬해부터 성적이 부진하자, McGraw 감독과의 관계는 더욱 껄끄러워졌다. 예전과는 달리 훈련에 소극적이였고 3년간 너무 무리했기 때문에 그의 팔이 이제 한물 갔다는 평가가 나왔다. Marquard 자신은 그러한 억측을 부정하며 1914년 5월 17일에는 피츠버그의 Babe Adams와 무려 선발투수 21이닝 맞대결을 펼쳐 승리를 거두었고, 1915년에는 브루클린을 상대로 1시간 16분만에 노히트 경기를 기록했다.
                            
그러나, 3년간 70승 넘게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던 그가 아니였다.
결국엔 팀에서 방출되었고, 여러 팀을 물색하던중 자신의 스승인 Wilbert Robinson이 감독으로 있던 브루클린으로 팀을 옮기게 된다. 과거처럼 완벽하진  않았지만, 1916년, 1920년 선발투수로서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며 소속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기여를 하였다.


1925년 브레이브스를 끝으로 은퇴를 한 그는 야구선수뿐만 아니라 배우로서의 화려한 삶을 살면서 많은 관심을 끈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수준급의 빠른볼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변화구와 완급조절에 더 많은 신경을 가졌다고 한다. "타자들은 웬만한 빠른볼은 다 칠수 있으나, 변화구는 제대로 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투구철학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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