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6 21:54:10, Hit : 77, Vote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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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강 양키스의 출발점, 명장 Miller Huggins




1901년 창단 이후 계속해서 리그 하위권에 머문 뉴욕 양키스는 1914년 육군 대령출신인 Jacob Ruppert가 팀을 사들이면서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했다. Ruppert는 팀전력 강화의 일환으로 먼저 카디널스 감독을 역임한 Miller Huggins에게 지휘봉을 맡겼고, 1920년에는 Babe Ruth를 영입, 그리고 1년 뒤에는 보스턴을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이끈 Ed Barrow를 단장으로 앉히면서 최고의 팀으로 거듭났다.

리그 최고의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였지만 Ruppert-Barrow-Huggins, 이 세 사람의 깊은 신뢰관계에 의한 구단운영 역시 최강팀 뉴욕 양키스를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 특히, Huggins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Ruth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살인타선(The Murderer's Row)을 만들어낸 일등공신 중 한명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작은 체구(신장은 165cm, 체중은 63kg정도에 불과)때문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까지 별다른을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신시내티 대학(Huggins는 Sandy Koufax와 함께 이 대학출신 중 최고의 메이저리거로 평가받고 있다)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뛰어난 지략과 지능적인 플레이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는 리드오프였다.

1902년 독립리그에서 스위치히터로서 활약을 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Huggins가 메이저리그 최초의 스위치히터였다는 주장도 있었다. 미네소타의 St. Paul를 거쳐 신시내티에 입단한 그는 1번타자였기 때문에 외형상의 성적이 하찮게 보일 수도 있지만, 주전 2루수로서 뛰어난 수비는 물론 타석에서 끈질긴 선구안을 발휘하면서 3차례나 한시즌 +100볼넷, 리그 최다볼넷을 4차례 기록하게 된다.

남들보다 작은 체구라 장타부재라는 약점을 민첩한 행동을 통해 매웠고 매시즌  50개 이상의 도루와 한경기 3개의 3루타를 기록할 정도로 훌륭한 주루센스와 기동력을 갖춰 당시 팀감독인 Ned Hanlon이 구사하는 야구스타일에 적합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20세기 초반의 메이저리그를 휘어잡은 수많은 명장들을 키워낸 Ned Hanlon은 Hit-and run 등의 작고 세밀한 작전에 의한 이기는 야구, 소위 '볼티모어식' 야구스타일을 보급하였는데, Huggins역시 훗날 이런 스타일의 야구를 양키스에도 접목시켰다.

1920년대 양키스 타자들이 장타력이 워낙 뛰어나 홈런포에 의존한 야구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Earle CombsㅡMark Koeing-Ruth-Gehrig-Meusel-Lazzeri 등 1번타자부터 8번타자까지 선수들의 능력을 명확히 파악하여 각자의 타순에 맞는 역할을 100% 수행하게끔 한 것은 Hanlon에게서 전수받은 섬세하고 치밀한 Huggins만의 야구스타일이였고, Dead Ball 시대의 마감과 함께 타자와 투수들의 스타일이 바뀌면서 여기에 효율적으로 선수들이 재빨리 적응하도록 한 것도 그가 높이 평가받을 수 있었던 한가지 이유였다.

1910년 카디널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1913년부터 감독직을 겸하게 된 Huggins는 오랜기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팀을 리그 3위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카디널스가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낸 것은 거의 30여년만의 일이었다.

1916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그였지만, 1917년을 끝으로 카디널스와도 결별하였다.

현직 변호사였고 주식투자에 일가견이 있을만큼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던 그는 구단경영에 대한 욕심을 갖고 카디널스를  매입하려 했지만 구단주인 Britton여사가 Branch Rickey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구단주와 갈등을 겪게 되고 마침 그 무렵에 양키스 Ruppert 구단주의 요청으로 양키스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당시 아메리칸 리그의 회장이자 Huggins와 같은 신시내티 출신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Ban Johnson의 추천도 그의 양키스행에 힘을 실어줬다.
1918년부터 팀을 맡으면서 곧바로 성적이 좋아진 것은 아니나 조금씩 강팀으로의 기틀을 잡아나갔고, Ruth, Barrow의 영입이 연이어 이어지면서 1921년 팀창단 이후 첫 번째 월드시리즈로 팀을 이끌게 된다.

Ruppert에게 양키스를 사라고 제안한 John McGraw의 뉴욕 자이언츠에게 2년 연속 패했지만, Huggins는 1923년 마침내 정상에 오르며 양키스의 첫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감독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Barrow가 Gehrig, Earle Combs, Tony Lazzeri 등의 젊은 신예들을 스카웃하면 Huggins는 그들을 야구장에서 조련하는 역할을 맡았고, 구단주 역시 재정적으로 전폭지원하면서 단장, 감독, 구단주가 특별한 잡음없이 삼위일체가 되어 양키스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그 어떤 팀도 대적하지 못할 최고의 강팀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 골칫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였다.
그중에서 Ruth의 안하무인적인 돌출행동은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이미 뉴욕의 슈퍼스타로 자리잡은 그는 감독과 구단주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제멋대로였다.

숙소에서 무단 이탈하여 매일밤 여자들과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빈번했고, 1925년에는 예기치 못한 장기간의 병원입원(대식가다 보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다가 어디가 탈이 났다고 함?)으로 결장한 이후 팀에 다시 복귀했지만, 팀훈련에 계속해서 지각을 했고 동료들간의 관계역시 좋지 못했다.

이에 Huggins는 Ruth에게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고 당시 선수들의 평균연봉과 맞먹는 5천$의 벌금을 부과하며 그를 통제하려고 했지만, Ruth는 팀원들이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Huggins에게 'Little Twerp(너저분한 놈)'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또한, 원정경기를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가는 도중에는 Huggins를 기차 난간에 매달기도 하였다. 하지만, Ruth의 위협에 굴복할 Huggins가 아니였다. 자신보다 덩치가 2배는 더 나가는 Ruth에게 무기한 경기출장 정지의 징계까지 내렸고, 진실된 사과없이는 절대 징계는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의지를 확고히 굳혔다.

Ruth는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지만, Huggins의 태도가 변할 기색이 없자 조금씩 조급해 했고, Ruppert를 비롯한 구단경영진도 Huggins를 지지함으로써 결국, Ruth가 백기를 들게 된다. 160cm의 단신인 Huggins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격언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고, 이러한 카리스마 'The Mighty Mite(힘센 꼬마?)'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신인, 베테랑 선수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선수들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한 그는 1925년 꾀병을 곧잘 부린 주전 1루수 Wally Pipp대신에 22살의 Lou Gehrig을 1루수로 기용하는 용단을 내리기도 했다. Pipp은 훗날 자신이 실제로 심한 두통을 앓았다고 했지만, 많은 이들은 느슨한 플레이를 한 Pipp과 이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Huggins간의 불화가 Gehrig의 등용을 앞당기게 된 이유였다고 평가를 했다.

1925년 Ruth 파동과 주전 1루수 교체 등으로 리그 7위까지 팀성적이 추락했지만, 몇차례의 팀위기를 넘기며 팀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모든 선수들은 Huggins의 지휘봉아래 1928년까지 3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진출, 그중 2차례는 상대팀에게 한 경기도 내주지 않고 8전 전승으로 우승을 함으로써 역대 최강의 전력이라는 평가와 함께 메이저리그의 전설로 영원히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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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4할 타자 Ted Williams
명투수 겸 배우, Rube Marqu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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