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7 13:45:36, Hit : 82, Vote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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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4할 타자 Ted Williams




(※Ted Wlliams에 대한 얘기는 웹상에서 검색만 해도 나오니 그냥 기록만 기술하기로 합니다.)

Ted Wlliams는 야구역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만약 2차대전과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한 공백만 없었더라면 700홈런은 물론, 타점,득점,볼넷 등에서 Ruth의 대기록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37년 보스턴의 스카우터로 활약한 명선수 출신 Eddile Collins에 의해 발견되면서 보스턴과의 인연을 시작하게 된 그는 1939년 4월 20일 라이벌팀인 양키스의 Ruffing로부터 우익선상을 가르는 2루타를 기록하며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20살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3할 타율을 가볍게 달성, 31홈런과 ML역대 신인최다인 149타점으로 팀의 공격을 이끌어 Jimmie Foxx 등 팀내 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보스턴의 차세대 주포로서 펜웨이파크를 찾는 팬들에게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뤘다.

양키스에게 리그우승의 문턱에서 번번이 밀려나며 밤비노의 저주를 풀지 못하고 있던 보스턴은 Williams를 필두로 Bobby Doerr 등의 신예들이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자 전력이 급상승하기 시작한다.
1940년 타율.344로 2년차 징크스없이 리그 3위의 성적을 기록한 그는 이듬해 1941년 시즌 중반까지 4할의 타율을 계속적으로 유지하여 1930년 뉴욕 자이언츠의 Bill Terry이후 어떤 타자도 달성하지
못한 꿈의 4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즌 막바지였던 9월 27일까지 타율.401을 기록하자, 당시 감독이었던 Joe Cronin은 4할타율을 유지하도록 경기에 더 이상 출전하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Willams는 그러한 제의를 거절하고 계속해서 경기에 출전하는 용기를 발휘하였다.

9월 27일 필라델피아 A's와의 경기에서 4타수 1안타로 타율이 .399로 추락하여 한때 4할의 꿈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음날 경기에서 5타수 4안타를 기록, .406까지 상승함으로써 1941년 4할의 타율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MVP까지 점쳐졌지만, 56경기 연속안타의 행진을 벌인 DiMaggio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려야 했고, Williams 자신도 DiMaggio의 수상이 당연한 것이라는 겸손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사적이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갖고 있던 DiMaggio와 달리 Williams는 기자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MVP수상에 적지않은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기자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그의 야구인생 전반에 이어졌고, 1942년 타율.356, 36홈런, 137타점으로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음에도 양키스의 Joe Gordon에게 다시 MVP수상의 영광을 빼앗기고 말았다.

시즌 중반 해군에 입영신청을 함으로써 3년간의 공백을 가지게 된 Willams는 1946년이 되어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타율.34238홈런, 123타점으로 군복무한 기간동안 5할이하의 승률을 기록한 팀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키켰으며, 정규시즌 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마침내  MVP를 차지하긴 했지만, 시즌 후반기에 당한 팔꿈치 부상으로 자신의 야구인생 중 유일했던 월드시리즈에서 1타점에 그치며  제대 복귀후 첫 시즌을 아쉽게 마감해야만 했다.

1946년 클리블랜드의 신예감독 Lou Boudreau가 "Williams Shift"를 고안할 정도로 당겨치는 타격을 계속적으로 했음에도 그는 웬만한 슬럼프없이 매시즌을 완벽히 소화하며 1947년 타율.343, 32홈런, 114타점으로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 MVP수상이 유력해 보였지만,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양키스의 DiMaggio에게 다시 MVP를 빼앗기고 말았다.

46년 리그 우승이후 당대 최고의 명장중 한명인 Joe McCarthy를 영입하고도 보스턴은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하였지만, Willams의 타격은 팀성적과 달리 지칠줄 몰랐고, 49년 커리아 최고인 159타점43홈런과 그해 타격왕을 거머쥔 George Kell에 0.002차이로 뒤지는 타율.343의 성적을 올리며 두번째 MVP를 차지하게 된다.

1950년 중반 다이빙 캐치를 하다가 왼쪽 팔꿈치를 부상, 7월에 뼛조각 제거수술로 많은 경기에 결장하였지만, 10년 가까이 이어온 +3할타율은 한치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1952년과 53년 한국전 참전으로 시즌의 대부분을 결장하여 20대초반에 이어 또 다시 공백을 가져야 했던 그는 30대중반의 나이로 다시 복귀, 계속해서 +3할의 타율을 기록하였으며 57년과 58년에는 각각 타율.388, .322로 리그 타격왕에 등극하게 된다.

1959년 생애 첫 2할대의 타율을 맛본 그는 41살의 나이가 된 1960년 8월 Ruth이후 처음으로 통산 2,000볼넷을 얻어내었으며, 은퇴발표후 마지막 경기였던 9월 26일 볼티모어와의 홈경기 마지막타석에서 홈런을 장식, 통산 521홈런을 기록하고 은퇴하였다.

선수시절 야구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외곬스러운 성격으로 가끔씩 팬들과도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역사상 최고의 타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6차례의 타격왕12차례의 최고출루율, 올스타 17회, 최다득점 6회, 통산타율.344, 통산 장타율.634(역대 2위)등 공격 전부문에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후 헌액자격이 주어진 첫해인 1966년 93.38%의 득표율로 헌액되었다.

두 차례의 전쟁참전으로 애국심의 표본이 되기도 한 Williams는 69년부터는 워싱턴 Senators(텍사스 레인저스 전신)감독을 맡으며 선수시절 이루지 못한 월드시리즈 우승의 한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5할의 승률을 기록하지도 못하고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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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스의 조용한 리더, Billy Williams
최강 양키스의 출발점, 명장 Miller Hugg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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