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7 22:33:48, Hit : 65, Vote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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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월드시리즈 MVP Mickey Lolich




1968년 월드시리즈는 양팀의 에이스 2명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고 있었다. 투고타저의 최정점이였던 시즌이였던만큼 평균자책점 1.12의 경이를 기록한 카디널스의 Bob Gibson과 30여년만에 한시즌 +30승을 달성한 디트로이트의 Denny McLain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친 양팀의 승부에서 가장 빛난 선수는 이 두명이 아닌 디트로이트의 Mickey Lolich였다.

Lolich의 정규시즌 17승도 팀동료 McLain의 31승에 비하면 다소 초라하게 보이는 승수였고, 평균자책 역시 1968년 리그 평균ERA 3.01 보다도 나쁜 성적이였기에 그가 보여준 월드시리즈에서의 투구는 오늘날까지 디트로이트 야구팬들의 뇌리에 아직까지 최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크로아티아 이민자 출신으로 1963년 22살의 나이에 타이거스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그는 신인시절부터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모터사이클 수집, 도너츠 굽기, 드럼연주가 취미였던 Lolich는 굉음을 내는 오토바이를 타고 매번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디트로이트는 61년 102승을 차지한 이후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당시 리그 최고의 타자들 중 한명이었던 Al Kaline, Norm Cash 등의 활약에 힘입어 언제라도 다시 리그 정상을 차지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춘 팀이었다.

데뷔 첫해인 1963년 불펜투수로 전반기부터 모습을 보인 이후 후반기부터는 선발투수로서 활약, 5승의 성적으로 잠재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팀의 에이스로 활약해왔던 Jim Bunning 이 필리스로 이적하게 되자 우연찮게 풀타임선발의 기회를 잡았고, 1964년 팀내 최다승인 18승의 성적을 기록함으로써 데뷔 2년차부터 기둥투수로 발돋음한다. 게다가 65년에는 20살의 Denny McLain까지 급성장하여 두명의 20대 영건들이 차츰차츰 리그의 타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즌을 거듭할수록 거칠줄 모르는 상승세를 보였던 McLain과 달리 Lolich는 투고타저의 시기였음에도 1966년 4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부진을 보였다. 4살이나 어린 McLain에게 에이스자리도 내준 상태였고, 명감독이였던 Lou Boudreau의 사위이기도 한 McLain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Lolich는 큰부상없이 자신의 선발등판을 거르지 않는 꾸준한 활약으로 2년 연속 14승을 하여 67년 새롭게 부임한 Mayo Smith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1945년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23년만에 다시 찾아온 우승의 기회를 노린 디트로이트는 Willie Horton, Norm Cash의 공격력과 31승을 기록하며 리그 사이영상과 MVP를 독식한 McLain의 활약에 힘입어 양대리그에서 유일하게 세자리 팀승수인102승으로 볼티모어를 12경기차로 가볍게 따돌리며 리그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투고타저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던지라 카디널스에서 두자리 홈런을 기록한 타자가 고작 2명에 그쳤던 반면, 디트로이트는 주전중에서 1개의 홈런만을 기록한 유격수 Ray Oyler외에는 8명의 주전선수 모두가 두자리 홈런을 쏘아올렸고, 36개의 홈런을 기록한  Willie Horton외에도 3명의 선수가 20개 이상의 홈런을
날리며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하였다.

하지만, 막상 두껑을 열고 경기를 시작해보니 디트로이트의 공격력은 힘을 쓰지 못했다.
원정 1차전에서 디트로이트는 McLain을 앞세웠으나 Bob Gibson의 강속구와 슬라이더에 디트로이트의 타자들은 추풍낙엽으로 쓰러졌고, 월드시리즈 한경기 최다기록인 17탈삼진의 제물이 되고만 것이다. 또한, 3개의 수비에러까지 범하며 첫경기에서 완봉패로 KO당하고 말았다.

믿었던 에이스 McLain를 내세우고도 패배했기 때문에 팀에게는 다소 충격이었고 기세가 완전히 꺾일 수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1차전을 완봉패르 내줬기 때문에 부담감은 더 클수밖에 없었고, 만약 2차전까지 내준다면 '월드시리즈 단골 완투 사나이' Bob Gibson에게 ko패 당할것은 뻔했다.

이런 압박감과 부담감을 안고 Lolich는 2차전에 등판하였다. 카디널스는 정규시즌 19승을 올린 Nelson Briles을 내세워 홈경기 2연승을 목표로 잡았다. 객관적인 성적에서 Lolich의 열세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메이저리그 통산타율.110, 그리고 통산 0개의 홈런을 자랑하는 Lolich가 Briles로부터 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이때부터 순풍에 돛단 듯 그의 위력투는 카디널스의 타자들을 압도하였고 1실점 완투로 시리즈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원점인 상태에서 디트로이트는 절반의 성공을 안고 홈경기에 대비하게 된다. 그러나, 3차전에서 카디널스의 투수들앞에 타자들은 다시 무릎을 꿇었고, 4차전에서 McLain은 다시 Gibson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제 한경기만 내주면 우승은 물건너가는 상황이었다.
Lolich는 또한번 팀의 사활을 걸고 5차전에 등판하게 된다. 1회초 Cepeda에게 홈런을 포함 3실점했지만 이후 무실점 이닝을 펼치면서 완투승을 기록하였다.

그의 활약에 힘을 입었던지 McLain도 앞선 두번의 등판에서 보여준 부진을 떨치고 6차전 완투승으로 30승 투수의 진면목을 발휘하였고, 2일만 쉬고 등판한 Lolich는 7차전에서 완투승으로 팀을 이끌며 월드시리즈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시리즈 3경기 완투, 3승, 평균자책점1.67의 성적으로 Gibson과 McLain의 경연장이 될 것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당당하게 시리즈 MVP까지 거머쥐는 영광을 안았다.그야말로 Lolich를 위한 월드시리즈였다. 

이때의 상승세에 힘입어 1969년에는 5월 23일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16탈삼진을 기록하며, 디트로이트 프랜차이즈 한경기 최다삼진기록을 수립하였고, 6월 9일 시애틀과의 경기에서도 16탈삼진으로 이해 19승을 기록하였다. 

1970년 19패를 기록, 66년에 이어 또 한차례의 부진한 시즌을 맞이했지만, 사생활 문란으로 급격히 추락한 McLain과는 달리 팀에 묵묵히 기여를 하였다.

부상없이 매시즌 꾸준하게 마운드를 지킨 결과 1971년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376이닝, 308탈삼진, 25승의 성적으로 투구이닝, 탈삼진, 다승에서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하였다 . 1점대의 평균자책을 기록한 오클랜드 A's의 Vida Blue에게 사이영상을 빼앗겼지만, Lolich 개인적으로는 68년 월드시리즈 MVP이후 최고의 시즌이였다.

이듬해인 1972년에도 22승의 성적을 수립한 그는 A's와의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도 2경기, 19이닝 3실점하는 피칭을 선보였으나,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호화군단 A's에게 패함으로써 생애 두번째 월드시리즈 무대진출에 대한 열망을 접어야만 했다.

1974년까지 4년연속 +300이닝을 투구하며 에이스 책임을 다한 Lolich는 1975년 12승 18패의 성적을 마지막으로 메츠로 이적하지만 계약문제로 인하여 77년을 통째로 쉬게 되고 샌디애고에서 2년간 불펜투수로서 활약한 뒤 1979년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비록, 사이영상과 같은 최고의 상을 수상하진 못하였지만 항상 꾸준하게 성적을 올림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보여왔고, 한차례의 +300탈삼진을 비롯, 총 7차례의 +200탈삼진으로 좌완투수로는 역대 4위에 해당하는 통산 2,832탈삼진을 기록하였다.

팀통산 최다탈삼진을 비롯하여 다승(217승), 출장경기(508경기), 이닝(3361.7이닝)에서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릴 만큼 디트로이트 110년 역사의 주인공중 한명이 바로 Lolich이다 .
은퇴 이후에는 평소 취미로 익혀왔던 제빵기술로 도너츠가게를 운영을 했고, 최근까지도 디트로이트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에게 많은 조언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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