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9 09:45:18, Hit : 70, Vote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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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lutch' Tommy Henrich




뉴욕의 라이벌이였던 양키스와 다저스는 1941년이 되어서야 월드시리즈 정상을 놓고 첫 맞대결을 펼쳤다. 다저스는 시리즈 1승 2패로 뒤지고 있던 4차전(10월 5일)에서 9회 1사까지 1점차의 리드를 지킨 가운데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릴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다.

하지만, 그 기회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사 주자없는 가운데 타석에 들어선 양키스의 우익수 Tommy Henrich가  풀카운트 상황에서 헛스윙 삼진을 당했지만, 다저스의 포수 Mickey Owen이 공을 옆으로 빠뜨리는 바람에 1루까지 진루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우승의 향방이 다저스에서 양키스로 옮겨가는 순간이었다.

포수 Owen이 공을 빠뜨리는 바람에 Heinrich는 무사히 1루에 진루할 수 있었다.
Henrich의 다음타자인 Joe DiMaggio가 좌전안타를 친데 이어, 좌익수 Charlie Keller가 2타점 2루타를, 6번타자인 포수 Bill Dickey가 볼넷, 2루수 Joe Gordon까지 2타점 2루타를 침으로써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결국, 이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다저스를 4승 1패로 가볍게 누르고 2년만에 다시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4차전에서 Henrich의 진루가 없었더라면 양키스의 우승이 손쉽게 이루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야구역사에 손꼽히는 이때의 명장면을 계기로 독일계 미국인 Tommy Henrich는 1940년대 DiMaggio와 함께 양키스를 이끈 최고의 타자로 명성을 쌓아나갔으며, 항상 꾸준하고 큰 경기에 강한 듬직한 선수로 입지를 굳혀나갔다.

Henrich는 1933년 인디언스에 입단했지만, 메이저리그 데뷔는 1937년 24살의 나이에 양키스에서 치루게 된다. 3년간 클리블랜드의 마이너에서 기량을 검증받은 그가 양키스로 옮기게 된 이유가 있었다.

1936년 메이저리그를 뒤엎는 사건이 일어났다.
강속구 하나로 美전역을 흔들어놓은 17세 소년 Bob Feller가 여러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와 메이저리그 선수계약을 체결하고 입단한 것이다. 학창시절 5차례가 넘는 노히트와 매경기 20개가 넘는 탈삼진, 그리고 메이저리그 팀과의 친성경기에서도 무지막지한 강속구로 타자들을 농락한 Feller가 입단하게 되면 팀간의 전력불균형이 생길 것으로 많은 팀들이 우려를 표명했다.

이러한 우려를 해결하기 위해 클리블랜드는 마이너리그 유망주들의 계약을 취소시켜 다른팀에서 스카웃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하라는 Landis 커미셔너의 명령이 있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Henrich는 양키스와 1937년 4월초 입단계약을 맺고, 5월 11일 화이트삭스와의 원정경기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루게 된다.

1934년 시즌이 끝나고 Babe Ruth가 이적하자, 우익수 포지션이 비게 되었고 양키스는 괜찮은 공격력을 보인 George Selkirk을 좌익수로 이동시키고, 중견수에는 DiMaggio를 그리고 우익수에는 Henrich를 배치시킴으로써 리그 최강의 외야진으로 재무장, 또다시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데뷔 2년차이던 1938년 Henrich는 22홈런, 91타점의 성적을 올려 Ruth, Gehrig을 잇는 좌타자로서 손색없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1939년과 1940년 2년 연속 무릎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결장하면서 잠시 주춤하는 바람에 신예 Charlie Keller에게 주전 우익수자리를 내줄 상황까지 몰렸지만, 1941년 31홈런으로 화려하게 부활함으로써 팀을 2년만에 월드시리즈로 이끌었다.

특히, 좌익수 Selkirk가 빠진 자리에 Keller가 좌익수로 활동하면서 양키스의 외야진은 이전보다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Henrich, DiMaggio, Keller 이 3명의 외야수가 모두 30개가 넘는 홈런을 쏘아올려 당시 상대팀 투수들은 양키스의 클린업타선을 피하기 위해 곤혹을 겪어야만 했다.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Henrich는 1할대의 빈타에 허덕이긴 했지만,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4차전에서 행운이 깃든 진루로 팀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해주었다.

1942년 데뷔 첫 올스타까지 선정된 이후 전성기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을 쯤 2차대전의 확전으로 인해 3년간의 해군생활로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를 떠나게 된다. 

1946년 30살을 넘긴 나이로 이전보다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DiMaggio에 이어 팀내 두번째인 16홈런, 98타점의 공격력으로 뉴욕팬들에게 다시 한번 다저스와의 Subway Series 선물을 선사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팀내 최고타율을 기록하며 1홈런,
5타점으로 다시 한번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양키스팬들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큰경기에서 한방을 터뜨려 경기를 해결하는 그에게 'The Clutch', 'Old Reliable'(믿을만한 노장선수 정도라고 해석하면 될듯)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48년 8월 13일 워싱턴 세네터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4번째 그랜드슬램으로 데뷔 이후 한번도 기록하지 못한 만루홈런을 한 시즌에 모두 몰아쳐 당시 메이저리그 타이기록을 수립했으며 35살의 나이에도 25홈런, 100타점을 포함하여 3루타부문(14개)과 득점부문(138득점)에서는 리그 1위를 차지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에도 Henrich의 진가는 계속해서 발휘되었다.
DiMaggio 등 주전선수들의 대거 부상속에 1루로 전향하여 24홈런, 85타점으로 팀타선을 이끌며 다시 한번 팀을 월드시리즈 무대로 진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번째로 맞붙는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는 양팀의 선발 Don Newcombe(11탈삼진)과 Allie Reynolds(9탈삼진)의 호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0-0의 상황에 마침표를 찍는 9회말 끝내기 결승 솔로홈런을 기록, 시리즈 전체를 유리하게 이끌어 팀에게는
우승을, 그리고 다저스에게는 또다시 쓴잔을 마시게 했다.

포수의 실책에 의한 운좋은 출루와 끝내기 홈런 등으로 3차례나 자신들을 곤란하게 만든 그의 존재가 다저스로서는 정말 눈에 가시였을지도 모른다. 1950년을 끝으로 Henrich는 무릎부상이 심해져 은퇴를 선언하긴 했지만, 은퇴후 바로 Casey Stengel 감독을 보필하며 코치로서 1956년까지 양키스의 유니폼을 입고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 다저스의 우승을 교묘하게(?) 방해했다. 1952,1953,1956년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는 양키스를 한 차례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군복무로 인한 공백으로 11년이라는 다소 짧은 선수기간이였지만, 올스타 5회에 빛나는 명성과 함께 특히, 큰경기에서 팀의 노장선수로서 한방을 떠뜨려준 활약때문에  양키스의 올드팬들은 Tommy Henrich를 양키스가 낳은 최고의 선수 중 한명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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