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19 10:09:21, Hit : 74, Vote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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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발의 Joe Jackson




오로지 야구에 대한 순수한 애착과 열정만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Joe Jackson은 1919년 블랙삭스 스캔들로 영구제명된 이후 아내와 함께 세탁소를 하면 인생을 보냈다. 1934년 자신의 권리회복을 신청하기도 했지만, 정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은 Landis 커미셔너는 그의 명예회복을 끝내 거부하였다.

그로부터 8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많은 야구인들이 그의 명예를 되살리려고 노력했지만, Jackson에 대한 징계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당시 글을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면서 징계에 대한 정당성이 조금씩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것은 그를 아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임에 틀림없다.  

6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Jackson은 가난한 집안환경 때문에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시기에 직물공장의 노동자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당시 그의 나이 6세였다.
평범한 가정의 자제들처럼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에겐 배부른 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노동자로 있으면서 야구라는 스포츠를 만났고 인생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장노동자들로 구성된 야구팀에서 기량을 인정받은 그는 16세에 지역 세미프로팀에 스카웃되면서 공장에서 받던 임금의 10배에 이르는 25$의 월급을 받고 프로생활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었다.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해 항상 주눅들어 살아왔기에 항상 무시당하며 '멍청이'라는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야구실력만큼은 그 어떤 사람도 Jackson의 능력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심지어 '신이 내린 천부적인 야구선수'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포지션은 원래 투수였다. 그것도 불같은 공으로 타자들을 압도하는 강속구투수였다.
그럼에도 그가 훗날 타자로 명성을 날리게 된 이유는 경기도중 Jackson이 던진 공을 받던 포수가 팔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였다. 이후로 팀의 어떤 선수도 그의 공을 받기를 꺼려했고, 결국 자신의 공을 받아줄 포수가 없어서 야수로 전향한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 중 유명한 것은 왜 그가 '맨발의 Joe Jackson(Shoeless Joe Jackson)'라는 별명이 붙여졌는가이다.
1908년 새로 구입한 야구화가 발에 맞지 않아 물집이 생기는 바람에 이웃팀과의 경기에 결장하려고 했지만, 당시 팀의 감독은 그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고 어쩔도리 없이 한 이닝동안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채로 경기에 임하게 된다. 신발을 벗고 양말만을 신은 상태에서 3루타를 기록했고, 이때부터 Shoeless라는 말은 그와 평생을 함께 했다.

1908년 필라델피아 A's의 구단주 겸 감독인 Connie Mack 으로부터 325$에 스카웃되면서 세미프로 생활을 접고 메이저리거로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A's에서 Jackson은 팀원들과 좋은 관계를 갖질 못했다. 팀원들로부터 멍청하다는 조롱을 들었고, 기회마저 제대로 부여받지 못했다.

메이저와 마이너를 들락거리며 잠재능력을 전혀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이다. 당시 일부 팀원들은 문맹에다가 어리숙해 보이는 Jackson을 제대로 대접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치사한 이유보다는 Jackson의 능력이 너무 출중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질투심과 시기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이유로 끝내 1910년 7월 Mack감독은 제대로 검증도 하지 않은 20살의 어린 선수를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 시키게 된다.    

20세기 초반 슈퍼스타 Nap Lajoie의 팀인 클리블랜드에서 처음으로 풀타임 시즌을 맞은 Jackson은 A's에서와는 달리 팀원들의 배려와 관심속에 1911년부터 팀의 주전 우익수로 활동하며 신이 내린 천부적인
능력을 마침내 폭발시켰다.

메이저리그 신인 최다안타 233개 기록(2001년 Ichiro가 경신)과 타율.408, 그리고 장타율,출루율 등 모든 공격부문에서 리그 탑의 성적을 남겼다. 당시 최고타자였던 Cobb과 용호상박의 타격레이스를 벌이며 강력한 경쟁자로 급부상하였다. 수비에서는 Cobb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들었다.
당시 지역신문의 기사 중에는 "그의 어깨는 외야에서 400피트 떨어진 홈까지 송구할만큼 강력하다"  언급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판단능력이 조금 부족했을뿐, 야구에 대한 센스 역시 탁월했다는게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였다.

이제 클리블랜드는 Lajoie의 시대에서 Joe Jackson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메이저리그 풀타임 첫해에 보여주었던 성적은 이듬해에도 여전히 변함없었다. 4할에는 아쉽게 실패했지만, 타율.395의 고타율로 Cobb의 독주에 제동을 걸 유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도 Cobb에 이어 리그 타율 2위를 차지하며 리그가 Cobb-Jackson의 양자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1915년 클리블랜드의 성적추락과 팀의 재정난으로 이해 여름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 되기전까지 Jackson은 매시즌 리그 공격 전부문에서 이름을 올리며 최고의 선수로 자리잡아갔다.

화이트삭스에서의 첫 시즌은 예전에 보였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새로운 팀에서의 성적도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졌다. 1916년 3할 중반대의 타율은 물론 최다안타와 자신의 전매특허인 3루타 부문에서도 리그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의 타격자세를 Ruth, 심지어 최고의 타자인 Cobb마저 따라했을 정도로 Jackson의 타격은 당시 가장 이상적이였다.

1917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맛보았고,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1918년에는 해군조선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1919년 다시 돌아와 팀내 최고의 공격력을 선보이며 팀을 다시 월드시리즈까지 올려놓았다.

신시내티와의 월드시리즈는 화이트삭스의 우승이 점쳐졌다.
그러나, 소위 Black Sox Scandal'로 팀동료들은 지는 경기를 했다.
이 와중에도 Jackson은 8경기에서 타율.394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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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삭스 스캔들(출처: by Ungurs, Maxmlb)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19년 시즌.
아메리칸리그의 우승 팀은 재작년에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였다. 당시 화이트삭스는 Babe Ruth가 타격의 모델로 삼았다는 전설적인 타격왕 '맨발의' Joe Jackson, 명 2루수 Eddie Collins, 권투선수 출신의 명 1루수 Chick Gandil 등이 이끄는 막강 타선과 Eddie Cicotte, Lefty Williams의 막강 원투펀치가 마운드를 지키는 최강의 팀이었다.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과 팬들은 화이트삭스가 내셔널리그 챔피언인 신시내티 레즈를 무난히 물리치고 월드시리즈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처음으로 벌어진 1919년 월드시리즈는 이전과는 달리 9전 5선승제로 치뤄졌다. 구단주들이 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경기 수를 늘린 것이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시리즈는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화이트삭스 팀이 고의로 시리즈를 패배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차전을 무기력하게 내준 화이트삭스는 3차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4,5차전에서 다시 선발투수들과
일부 야수들의 고의성 짙은 실책으로 패배했고, 6,7차전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시리즈 전적 4승 3패의 상황에서 화이트삭스 지난 2경기에서 보여준 저력을 감안하면 시리즈를 뒤집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미 레즈에게 막대한 돈을 건 도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8차전 선발로 예정되어 있던 Lefty Williams에게 해결사를 보내 그를 협박했다.

만약 내일 경기에서 패하지 않으면 그의 부인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Williams는 협박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화이트삭스는 8차전에서 10 - 5 로 패했다. 그리고 월드시리즈는 레즈의 승리로 끝났다.

1919년 월드시리즈가 시작되기 직전에 화이트삭스 소속의 8명의 선수들이 도박사들과 시리즈를 고의로 패배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음모에 가담한 8명의 선수는 주모자 격이었던 1루수 Gandil, 투수인 Cicotte와 Williams, 3루수 Fred McMullin, 유격수 Swede Risberg, 만능 내야수 Buck Weaver, 외야수인 Joe Jackson과 Felsch였다.

이들은 구단주 Charlie Comiskey의 연봉 정책에 불만을 품고 도박사들로부터 8만달러를 받기로 하고 경기에 져주기로 했다.
그들의 불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Comiskey는 지독한 수전노였는데 불세출의 타자라고 불리던 Joe Jackson에게 단 6000달러의 연봉을 지불했을 정도였다(당시 웬만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연봉은 1만 달러가 넘었다)...  

Comiskey의 악랄한 연봉 정책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일화가 1917년에 있었다.
당시 에이스 투수였던 Cicotte는 시즌 30승을 거둘 경우 Comiskey로부터 1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기로
계약했었다. 그리고 그 해 9월이 시작되기도 전에 Cicotte는 28승을 올렸고, 시즌이 한 달이나 남은 상황에서 2승을 더 올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Comiskey는 Cicotte가 28승을 거두자 감독에게 압력을 넣어 그가 남은 경기에서 출장하지 못하도록 해버렸다. Cicotte는 1919년에도 29승을 올렸으나, 여전히 연봉은 6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Comiskey가 얼마나 악랄한 구단주였는지를 말해주는 일화는 또 있다.
당시 선수들은 원정경기를 떠날 때면 구단으로부터 세탁비 명목으로 얼마씩을 받곤 했다. 그러나  Comiskey는 선수들에게 세탁비를 지급해주지 않아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원정 경기에서 때에 절은 구질구질한 유니폼을 입고 시합할 수 밖에 없었다.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돈을 받고 고의로 패배한다는, 운동선수로서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은 1차적으로 구단주 Comiskey에게 있었던 것이다.

1919년 월드시리즈가 끝난 후 화이트삭스 구단주 Comiskey와 감독 Gleason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심증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Comiskey는 승부 조작의 물증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1만 달러의 현상금을 주겠다는 광고를 내걸었다.

1919년 구단주들간의 윈터 미팅에서도 화제는 단연 승부 조작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도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1920년 시즌이 시작되자 전년도 월드시리즈에서 승부 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은 점점 더 짙어졌다.
의혹은 또 다른 의혹을 낳았고. 결국 아메리칸리그 회장 Ban Johnson이 직접 승부 조작 의혹에 대한 내사를 지시했다. 그리고 9월 24일 뉴욕 자이언츠의 투수 Rube Benton이 Cicotte, Felsch, Williams,  Gandil 등의 이름을 거명하며 승부 조작에 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법정에서 의혹을 밝힐 것을 주장했다.
날이 갈수록 조작극의 베일은 벗겨져 갔고 마침내 9월 27일 '필라델피아 노스 아메리카' 신문은 조작된 특정게임, 선수들이 받은 액수까지 소상히 들춰가며 그 때까지 나온 기사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진상을 밝혔다.

그 기사를 가장 먼저 읽은 사람 가운데 하나인 Kid Gleason 감독은 Comiskey 구단주를 다시 한번 만나 모의에 가담한 선수들에 대한 처리방안을 상의했다. Gleason 감독은 다음 날 상오 비상 회의에 Cicotte를 불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Comiskey와 Gleason 그리고 구단 고문 변호사가 모여 있는 자리에 출두한 Cicotte는 채근을 받기도 전에 자신의 비행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국, Comiskey와 Gleason은 Cicotte를 법정에 세웠고, 그의 자백으로 다른 관련자들인 Gandil, Jackson, Risberg 등도 속속 법정에 세워져 그들이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자행한 고의 패배의 전모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나 판결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선수들의 변호인 측은 "피고인들이 도박사들로부터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선수들이 대중을 기만하거나 야구에 누를 끼칠 의도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이들은 비밀리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는 한 국민적 오락의 위신을 떨어뜨렸다거나 야구산업에 해를 미쳤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재판을 맡은 판사들를 설득하는데 충분했다.

결국 법정은 화이트삭스 선수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선수들과 도박사들이 유죄가 되려면 월드시리즈의 승부를 뒤엎기로 공모한 의도가 단순히 져주려는 데 있지 않고 대중을 기만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구단주들이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새롭게 선임한 대법원 판사 출신의 커미셔너 Kenesaw Mountain Landis는 법정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독실한 청교도 신도로 정의감에 불타고 있던 Landis 판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야구계에 만연한 악습에 대해 철퇴를 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여론 역시 법정의 결정에 불만을 나타냈다. '시카고 헤럴드 앤드 이그재미너' 신문은 "이번 재판은 승부 조작 음모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는 것을 캐기보다는 빠져나갈 구멍만 찾으려 했던 인상이 짙다." 라고 꼬집었고 '뉴욕 타임즈' 신문은 "문외한이 보기에는 마치 어떤 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희생자를 살해할 의사를 갖고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목을 잘랐는지를 따져 묻는 것과 같았다." 고 논평했다.

결국 법정의 판결이 내려진 이튿날, 커미셔너 Landis 판사는 이번 사건에 관련된 선수에 대해 야구계로부터 영구추방 명령을 내렸다.

승부조작사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잡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1920년은 Jackson이 재도약의 계기가 된 시즌이었다.  218안타, 12홈런, 121타점, 타율.382로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 최고수준의 경기력을 펼쳤고, 그가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는 말의 사실여부를 떠나 모두가 인정한 리그 최고의 타자라는 것을 재차 입증했다.

하지만,  Landis판사가 사건에 참여하면서 져주기 경기는 사실로 판결남에 따라 Jackson 역시
그의 연봉액과 거의 맞먹는 5천$을 받았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결국, 8명의 선수들은 야구계에서 영구추방이라는 죄를 받고 말았다.
1920년 9월 27일 디트로이트와의 원정경기 6회를 끝으로 Jackson이 타격에 들어서는 모습을 팬들은 다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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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타임으로 활약한 1911년부터 1920년까지 리그 타격 7위가 가장 저조한 성적이었을 정도로 Jackson은 항상 최고를 달렸다. 그의 친필사인은 1990년대 2만불에 경매되었고, 배트는 무려 50만불이 넘는 높은 가격에 팔렸다.

그의 플레이를 보지도 못한 야구팬들조차 Jackson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문맹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Jackson의 復權조치는 탄력을 받고 있어 'Shoeless Joe Jackson'이라는 이름이 명예의 전당 한곳에 새겨질 날이 어쩌면 그리 멀지만은 아닐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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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양키스의 캡틴, Thurman Mu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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