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21 22:19:27, Hit : 83, Vote : 7
 Roberto_Clemente.jpg (73.3 KB), Download : 0
 중남미선수들의 영원한 우상 Roberto Clemente




1972년 9월 30일 피츠버그의 홈구장 Three Rivers Stadium에서 팀의 기둥인 Roberto Clemente가 메츠의 좌완투수 Jon Matlack을 상대로 통산 3천안타의 고지를 점령했다. 메이저리그 데뷔 18년만에 이룩한 대위업이였다.

4회말 커리어 440번째 2루타로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11번째로 3천안타 클럽에 가입을 하게 된 그를 향해
피츠버그 홈팬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기립해서 열렬한 갈채를 보냈고, Clemente를 중심으로 한 피츠버그의 선수들은 다시 한번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쾌거를 올리게 된다.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신시내티에게 무릎을 꿇으며 월드시리즈 진출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37세의 Clemente는 5경기에서 1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공수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새해가 밝아오기 하루전인 1972년 12월 31일.
그는 평소 자신의 신념대로 지진으로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던 니콰라과의 Managua 지역에 전해줄 식량과 약품 등의 구호물자를 비행기에 싣고 자신의 고국인 푸에르토리코 연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륙후 얼마되지 않아 Clemente를 포함한 5명의 승객과 물자를 실은 비행기의 엔진에서 화염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바다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푸에르토리코의 국민들은 비탄에  빠졌고,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3일간의  애도기간을 공포했다. 메이저리그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도 푸에르토리코 국민과  마찬가지로 애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준량을 초과한 과도한 화물적재와 엔진 결함까지 발생하면서 가슴아픈 사고로 이어졌다는 사고조사팀의 공식발표가 며칠후에  있었다.

오늘날까지 중남미 야구인들의 영원한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그의 업적을 기려 Bowie Kuhn  커미셔너는 사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수여하던 기존의 사회봉사 공로상의 명칭을 'Roberto Clemente Award'로 개칭하였고, 은퇴후 5년의 유예기간이 필요한 명예의 전당 헌액 원칙을 Clemente에게만은 특별히 예외로 하여 1973년 92.69%의 득표율로 헌액하였다.

중남미 출신 메이저리그 선수로는 처음으로 쿠퍼스타운에 이름을 새긴 것이다 또한, 1973년 시즌 홈개막경기에서 그의 미망인과 3명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영구결번(#21)행사를 가지며, 불의의 사고로 떠난 야구영웅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푸에르토리코의 San Anton이라는 지역에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일하는 아버지 밑에서 7남매의 막내로 출생한 Clemente는 어려서부터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단거리 달리기 뿐만 아니라 어깨 힘이 워낙 좋아 창던지기 대회에서 줄곧 정상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Clemente 자신은 야구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그를 살펴본 주위 사람들은 어린 Clemene가 위대한 야구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후 모국의 겨울리그(Santurce Crabbers팀)에서 주급 40$을 받으며 뛰어난 활약을 하자, 당시 그의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다저스의 스카우트  Al Campanis와 구두계약을 체결하고 입단을 결정하게 된다.

다저스와 정식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밀워키 브레이브스가 3만$의 고액계약금을 제시했지만, 이미 Clemente의 마음은 당시 메이저리그 강팀으로 군림하고 있던 다저스로 굳힌 상태였고, 1만$의 금액을 조건으로 1954년 2월 브루클린 다저스와 정식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17살이였다.

입단과 함께 다저스의 트리플A  팀이였던 몬트리올 로얄스에서 148타석에서 2할중반의 타율을 기록한 그였으나, 이해 11월에 갑작스러운 트레이드로 피츠버그로 팀을 옮기게 된다.

당시 4천$ 이상의 금액으로 계약을 한 신인 선수는 1년동안 의무적으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들어가야 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다저스가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이였다. 이 사실을 안 피츠버그의 단장이자 Jackie Robinson을 메이저리그 선수로 만든 Branch Rickey(※1950년 Rickey는 구단주 Walter O'Malley와 갈등이 생겨 다저스와 결별하고 피츠버그 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5천$을 다저스 측에 주고 Clemente를 데려왔다.
                                        
메이저리그 혁명가로 불렸던 Rickey가 만들어낸 마지막 작품이 Clemente였던 것이다.

1952년부터 3년 연속 시즌 100패 이상을 기록하며 끝없는 추락을 하고 있던 팀이라 Clemente의 빅리그 진입은 1955년 곧바로 이루어졌다. 팀의 붙박이 우익수가 된 그는 2할 중반대의 타율로 시즌을 소화했고, 차곡차곡 성적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데뷔 이후 5년간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신인시절부터 괴롭힌 만성적인 등부상도 문제였지만, 이국땅에서의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단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선수시절 내내 그는 영어가 유창하지 못해 매스컴으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흑인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입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던 시점이라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있었고, 게다가 팀내에서 유일한 외국인였기 때문에 보이지 않은 차별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타석에서 목을 이리저리 흔들고 주의산만할 정도로 스트레칭을 하는 비정상적인 타격폼은 그의 약점으로 계속해서 지적되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비정상적인 타격폼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기 시작했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데뷔 6년째가 되던 1960년부터 진면목을 발휘하게 된다.

시즌 타율.314, 16홈런, 94타점으로 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기여를 하였다.
7차전 9회말 끝내기 홈런을 기록한 Bill Mazeroski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지만, Clemente는 시리즈 7경기에서 모두 안타를 치는 맹활약을 하였다.
메이저리그 외야진의 빅스타들이였던 Willie Mays, Hank Aaron, Mickey Mantle의 아성에 Clemente가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 1961년은 한단계 더 향상된 모습으로 팬들에게 다가가 타율.351로 리그 타격왕은 물론 23홈런, 89타점으로 MVP급 성적을 기록하였고, 골든글러브까지 차지하여 향후 10년 넘게 이어진 외야수 Clemente시대의 화려한 서막을 올렸다.

Willie Mays가 수비에서 최고였다고 하지만, 송구만을 따져보았을때는 Mays도 Clemente에게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의 의견들이였다. 신인시절 Clemente는 피츠버그의 홈구장인  Forbes Field의 우중간지역에서 홈까지 460피트가 되는 거리를 노바운드로 송구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외야 송구를 자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팀 주자들은 항상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펜스를 넘기는 홈런성 타구를 걷어내거나, 다이빙 캐치로 상대팀의 타구를 잡아내는 것도 거의 그의 전매특허가 되다시피했다.

1960년부터 8년간 그의 시즌 타율은 0.312 이하로 내려간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고,  이 기간 4차례의 리그 타격왕을 거머쥐었다. 한시즌 최다홈런은 1966년에 기록한 29개가 최고였지만, 라인 드라이브 타구를 날리는 스프레이 히터로서 그 어떤 슬러거들보다 위협적인 타자였다.

1964,1965년 2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하고도 MVP 등극에 실패했던 Clemente는 1966년 29홈런, 119타점, 타율.317로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고, Sandy Koufax와의 치열한 접전끝에 마침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MVP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967년에는 커리어 최고인 타율.357과 23홈런, 110타점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내지만, MVP는  Clemente와 비슷한 성적임에도 카디널스의 리그 우승에 기여한 Orlando Cepeda에게 돌아갔다.

30대를 넘어서도 그의 성적은 전성기를 구가했고, 중남미 선수들의 정신적인 기둥으로서 경기장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고, 중남미 국가들의 여러가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며 시즌이 끝나면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쳤다.

1969년에도 그의 타격은 식지 않았다.
타율.345로 Pete Rose에 이어 리그 2위를 차지했고, 36세가 되던 1971년 시즌은 마지막 불꽃을 불사른 시즌이였다. 13홈런, 86타점, 타율.341의 정규시즌 성적에 이어 4명의 20승 선발 투수진을 보유하고 있던 볼티모어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1960년 월드시리즈에 이어 또 한번 7경기 전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하며 2홈런, 11안타, 4할이 넘는 성적으로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되었다.

수비에서의 활약도 눈부셨다.
6차전에서 볼티모어의 발빠른 외야수 Merv Rettenmund가 3루에 있는 가운데 Frank Robinson의 외야플라이를 잡은 후 노바운드 미사일 송구로 3루주자의 득점을 막아낸 것이다.

규정타석을 채우진 못했지만, 1972년에도 3할타율을 계속해서 유지했고, 12년 연속 골든글러브의 기록도 이어갔다. 한경기 3개의 3루타를 기록(1958년 9월)할 정도로 빠른 발과 탁월한 주루 플레이로 매시즌 평균 10개 정도의 3루타를 기록한 Clemente였지만, 그는 온갖 부상을 달고 뛰어다녔다.

만성 위장장애, 두통은 그의 선수생활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장애물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한 정신력으로 최고의 활약을 펼친 것이다. 아마도 야구에 대한 강한 열정과 애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1972년 시즌후 지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야구에 대한 애정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I am convinced that God wanted me to be a baseball player. I was born to play baseball.."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피츠버그는 팀의 영웅을 잃었지만, 생전에 그로부터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던 Willie Stargell와 Al Oliver, 그리고 Clemente의 우익수 자리를 넘겨받은 Dave Parker의 맹활약으로 팀은 1979년 다시 한번 월드시리즈 정상을 차지하였다.




Name
Memo      


Password


'Walking man' Eddie Yost
'Mr. Tiger' Al Kaline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