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25 20:38:47, Hit : 64, Vote : 4
 Sam_Mcdowell.jpg (14.5 KB), Download : 0
 술의 유혹에 무릎꿇은 Sam McDowell




만약 1970년대 미국사회에 금주령과 같은 법적인 조치가 있었더라면  'Sudden' Sam McDowell명예의 전당헌액은 물론 탈삼진역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기록을 작성했을지도 모른다. 최연소 300탈삼진, 한차례의 1점대 평균자책점과 20승은 그의 능력과 소질이 충분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은퇴당시 그가 남긴 4개의 메이저리그 기록과 11개의 아메리칸 리그 투수 기록은 McDowell의 쿠퍼스타운 입성을 더욱 확고하게 해줄 수 있는 확실한 요소였다.

하지만, 결국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져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조기 은퇴하고 말았다.

1954년 월드시리즈 진출이후 조금씩 전력이 약화되고 있던 클리블랜드는 50년대 초반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Al Lopez감독과 Bob Feller등의 주축선수들이 저물어 가면서  5할이하의 승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당시 18살의 나이였던 McDowell도 1961년 한 경기에 잠깐 모습을 비춘 이후 2년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능력을 검증받았다.

데뷔초 다소 제구력에 불안한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풀타임 3년차가 되던 1963년부터 안정권에 들어가 불같은 강속구로 타자들을 압도하게 된다. 22살이 되던 1964년에는 자신의 최고무기인 강속구에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을 수 있는 체인지업까지 위력을 발휘했고, 시즌을 거듭할수록 안정을 찾아가는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325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게 된다. 최연소 300탈삼진을 기록한 시즌이었다.

1910년 Walter Johnson역시 22살의 나이로 300탈삼진을 잡긴 했으나, 정확히 계산한다면 McDowell이 2달까량 더 빠른 나이로 메이저리그 전체 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이때 보여준 그의 10.71개/ 9이닝의 탈삼진은 1984년 메츠의 Dwight Gooden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메이저리그 기록이였으며, 피안타율.180으로 말그대로 마운드를 평정한 시즌이었다. 평균자책에서도 2.18 로 리그 1위를 차지, 만약 팀타선이 제대로 지원만 해주었더라면 17승 11패의 성적에서 좀더 많은 승을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고, 트리플 크라운까지 차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듬해 1966년 시즌 초반 부상으로 200이닝을 채 소화하지 못했음에도 225탈삼진으로 2년 연속으로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하였으며 1967년 보스턴의 Jim Lonborg에게 잠시 탈삼진 왕관을 내주긴 하였지만, 1968년부터 다시 시즌당 평균 280개가 넘는 탈삼진 행진을 벌여 1년만에 닥터K 타이틀을 다시 거머쥐게 된다.

1968년 팀이 잠깐 반짝하는 성적을 기록하긴 했으나, 매시즌 팀성적이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고 5할의 승률은 커녕 4할에도 미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하는 해가 거듭되었다. 결국 이러한 팀성적은 McDowell에게도 영향을 끼쳐 투구타저가 정점에 달했던 1968년에는 평균자책 1.81을 기록하고도 15승 14패로 간신히 5할을 넘게 된다.

1970년에도 팀은 5할의 승률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는 데뷔후 가장 많은 305이닝을 소화하며 304탈삼진으로 5번째 리그 탈삼진 타이틀과 생애 2번째 +300탈삼진, 그리고 생애 첫 20승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65년에도 트리플 크라운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며 사이영상까지 노렸으나, 당시 리그 구분없이 시행되고 있었기에 Sandy Koufax에게 밀려 아쉽게 놓친 그는 이해 사이영상에 근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볼티모어의 막강 3인방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24승의 Dave McNally, Mike Cuellar,  20승의 Jim Palmer가 그들이였다. 이 3명에게 기자들의 표가 분산되었고, 결국 이들이 접전을 벌인끝에 역시 24승으로 리그 다승 공동 1위를 차지한 미네소타의 Jim Perry에게 어이없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가고 말았다.  만약 승수에서 2승 정도만 더 기록했더라면, McDowell의 사이영상은 100%였을 것이다.

1970년의 사이영상 수상 실패에 대한 실망감이였을까?
20대의 젊은 투수는 데뷔 이후 가장 많은 153볼넷을 허용하면서 제구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매특허인 탈삼진에서도 급격히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몰락은 팀성적에까지 영향을 미쳐 클리블랜드 역대 타이기록인 102패의 수모를 입게 된다.

비록 6번째 올스타전에 출전하긴 했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도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끝내 술과 과도하게 친해지면서 알콜중독증세를 보이기 시작, 항상 술에 취한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는 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에서 등판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선수를 좋아할 팀이 있을리 만무했다. 끝내 클리블랜드와의 마지막 시즌이 된 그해 13승 17패의 성적을 끝으로 1971년 시즌 종료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되었고, 다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살리지 못한채 1975년 피츠버그에서 32살의 나이로 은퇴하게 된다.

74차례의 한경기 +10탈삼진(역대 4위)으로 1970년까지 메이저리그 최고의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린 투수라고 보기엔 너무나 갑작스럽고 허무한 은퇴였다. 만약 그가 클리블랜드가 아닌 볼티모어나 미네소타와 같은 당시 리그 강팀에서 활약했더라면 좀더 오랜 시간동안 그의 활약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매시즌 리그 정상권의 평균자책과 독보적인 탈삼진을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다승왕을 차지하기에는 승수에서 많이 부족한 상태였고, 클리블랜드는 그에게 많은 승을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 이래저래 많은 아쉬움이 남는 투수라는 생각이 든다.

클리블랜드 100년 역사에서 1940년대 Bob Feller, 1950년대 Herb Score와 함께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리며 짧은 시간동안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15년간의 투수생활을 끝낸 그는 은퇴이후도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결구엔 이혼까지 당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정을 잃고 나면서 제정신을 차려 술을 끊었고,  대학에서 스포츠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 텍사스와 토론토 구단의 심리치료사로 활동하였으며 저명한 스포츠 심리학자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고 한다.




Name
Memo      


Password


Lou Brock, 도루 역사를 새로 쓰다.
클리블랜드의 영건 Hurricane Herb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