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25 23:08:56, Hit : 73, Vote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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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u Brock, 도루 역사를 새로 쓰다.




Babe Ruth로 대표되는 홈런야구의 시대가 본격화된 1930년대부터 기동력에 의한 야구는 조금씩 퇴색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1962년 다저스의 Maury Wills가 시즌 100개가 넘는 도루를 기록하면서 발빠른 야구의 중요성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최고의 대도로 명성을 날렸던 Lou Brock의 등장으로 130년의 메이저리그 도루 역사는 새롭게 쓰여졌다.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Brock은 목화농장에서 일을 하며 학업을 병행했다고 한다. 13세부터 야구를 시작하여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던 그는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58년, 시카고에서 열린 팬암대회에서 미국대표로 출전하여 눈부신 활약을 보였고, 컵스로부터 입단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당시 컵스의 슈퍼스타였던 Ernie Banks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Brock은 1961년 3만$의 계약금을 받고 컵스에 정식입단을 하게 된다. 마이너에서 3할 중반대의 타율을 기록하자 구단에서는 Banks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그를 입단 첫해인 1961년 9월 메이저리그로 바로 승격시켰다.

1962년 팀의 주전우익수로 풀타임 시즌을 시작한 Brock은 스피드와 장타력에서도 예상대로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해 6월 17일 메츠와의 경기에서는 그 유명한 Polo Grounds의 센터를  넘기는 무려 500피트(약 151m)짜리 홈런을 쏘아올려  대학시절부터 쌓아왔던 명성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구단관계자들은 그의 실력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신인 첫해 2할 중반대의 타율을 기록하였고, 다음해에도 성적이 특별히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수비에서는 거센 바람이 부는 리글리 필드에서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해 외야수비에서 헛점을 드러냈다. 리드오프로서 출루율은 간신히 3할은 넘었고, 볼넷은 30개 내외에 그친 반면 삼진은 볼넷보다 4배나 많은 120개나 기록하면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기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1964년에는 최악의 출발을 하고 말았다. 42타수 3안타의 극심한 슬럼프로 구단의 신뢰는 완전히 땅에 떨어져 버렸고, 결국 이해 6월 Brock을 2명의 선수와 함께 카디널스로 트레이드 시켜 버렸다. 컵스가 이 트레이드로 얻게 된 선수는 1960년 리그 다승왕 출신이자 전년도 18승을 거두었던 젊은 우완투수Ernie Broglio였다.

당연히 컵스는 리그 정상급의 투수를 얻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컵스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 중 하나로 기록되고 말았다.
Broglio는 이해 어깨가 고장나면서 2년간 단 7승만을 거둔채 은퇴를 해 버렸고, Brock은 카디널스에게 2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김으로써 최고의 선수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은퇴한 Stan Musial의 뒤를 이어 팀의 좌익수가 된 Brock은 컵스에서와 달리 카디널스에는 연일 맹타를 휘두르며, 3할 중반대의 타율과 33개의 도루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리그 4위에 쳐져있던 팀을 리그 우승까지 이끌게 된다.
                            
생애 첫 200안타고지까지 밟은 그의 활약은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이어져 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7차전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3점 아치를 그렸다.
1965년부터 Brock은 숨기고 있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팀의 리드오프로서 매시즌 50개가 넘는 도루와 시즌 평균 15개의 홈런으로 상대팀의 마운드를 흔들어 놓았다. 

1967년 메이저리그 최초로 한시즌 20홈런-50도루를 수립하면서 커리어 최다인 206안타, 21홈런, 76타점, 52도루로 최고의 한해를 보낸 Brock은 팀의 에이스 Bob Gibson과 함께 3년만에 다시 팀을 리그 정상으로 올려놓았고, 보스턴과의 월드시리즈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하며 생애 2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보게 된다. 월드시리즈에서 4할이 넘는 타율과 7개의 도루,  특히 1차전에서 보여준 Brock의 활약에 보스턴 선수들은 기가 찰 따름이었다.

카디널스가 기록한 10개의 안타 중 4개를 Brock이 만들었고, 2개의 도루는 물론 팀득점(2점)을 혼자서 기록하여 완투승의 Gibson과 함께 시리즈를 유리하게 이끌도록 만들어 놓았다.
시리즈 7경기에서 7도루와 양팀을 통틀어 가장 높은 타율.414을 기록하여 MVP를 수상한 Gibson 못지 않은 활약을 한 것이 바로 Brock이였다.

월드시리즈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은 역대 최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Brock을 거론할 때 그의 도루를 먼저 거론하게 되지만, 3차례의 월드시리즈를 통해 남긴 그의 성적 또한 도루 못지않게 높이 평가받고 있는 부분이다.

1968년 디트로이트와의 월드시리즈에서는 우승에 실패했지만, Brock은 2개의 홈런으로 타율.464를, 그리고 도루에서도 전년도 월드시리즈와 마찬가지로 7개를 성공시켜 상대를 마구 흔들어 놓았다. 1964, 1967, 1968년 총 3번의 월드시리즈에서 통산 87타수 34안타, 타율.391을 기록하며, 월드시리즈 통산 타율 역대 5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최소 75타수 이상의 선수들중에서는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출루율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장타력과 기동력은은 인정받았지만,  팀의 리드오프로서 출루율은 항상 3할대에 그쳤고,  BB/SO의 비율은 1:3정도로 선구안에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특히, 1964년부터 69년까지는 매시즌 세자리수의 삼진을 당한반면 볼넷은 4,50개에 그쳤다.

또한, 수비에서도 잦은 실책을 범해 7차례나 외야수 부문 리그 최다에러를 기록하여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역사를 새롭게 쓴 도루와 월드시리즈 성적이 있었기에 그의 단점이 희석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30세를 넘기면서 그동안 지적받았던 선구안 문제도 조금씩 호전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삼진수는 두자리수로 내려갔고, 볼넷은 조금씩 그 수치가 높아졌다. 타율도 3할대로 상승하였고, 1970년부터 5년간 안타수도 +200안타 2회를 포함하여 +190안타를 계속해서 기록하였으며, 자신의 전매특허인 도루에서는 경험까지 쌓이면서 시즌 60개가 넘는 도루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35세가 되던 1974년 메이저리그 역사를 새롭게 작성하게 된다. 9월 10일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2개의 도루를 기록, 12년전 Maury Wills가 달성한 104개를 뛰어넘었고, 9월 29일에는 친정팀 컵스를 상대로 시즌 118번째 도루를 성공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통산도루에서도 1920년대 피츠버그의 Max Carey가 가지고 있던 내셔널리그 기록(738개)도 깨뜨렸다.

은퇴를 생각할법만 나이에서 수립한 대기록들이라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12년 연속 한시즌 +50도루를 꾸준히 했기 때문에 이제는 메이저리그 통산도루 경신도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1977년 3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8월 29일 샌디애고와의 경기에서 마침내 Ty Cobb의 892개를 뛰어넘었다.

1979년 통산 3,000안타 수립과 통산 938번째 도루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그에게 팀에서는 영구결번(#20)행사를 성대히 베풀어 주었으며, Brock은 헌액자격이 주어지는 첫해인 1985년 79.75%의 득표율로 헌액되었다.

선수시절부터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으로 Roberto Clemente 상을 수상(1975년)한 적도 있는 그는 계속해서 청소년 선도사업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으며, 스포츠 용품사업을 통해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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