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26 14:00:11, Hit : 70, Vote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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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10월 1일, Roger Maris 61번째 홈런을 쏘다




1961년 10월 1일 라이벌 보스턴과의 시즌 마지막경기를 홈에서 치루고 있던 양키스는 이 경기전까지 108승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을 이미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이제 구단의 입장에서는 지난해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에게 당했던 아쉬운 패배를 설욕하는 동시에 양키스 제국의 명맥과 전통 유지가 최고의 목표였을 것이다.

하지만, 팀동료들과 메이저리그 팬들의 관심은Roger Maris가 Babe Ruth가 기록했던 한시즌 60홈런의 벽을 허물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보스턴의 선발투수 Tracy Stallar를 상대로 Maris는 1회말 3번타자로 첫 타석에 들어서 좌익수 방향으로 큼지막한 외야 플라이를 날렸으나, 보스턴의 신인 좌익수 Carl Yastrzemski에게 잡혀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났다.

다음 타석은 4회말..
투볼상황에서 Stallar는 볼넷을 원하지 않는 양키스 관중들의  야유속에 빠른볼을 낮게 던졌다.
그 순간 Maris의 배트는 힘차게 돌아갔고, 그 공은 마침내 양키스 구장의 우측펜스를 훌쩍 넘어갔다.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Maris 개인에게는 말로 하기 힘들었던 정신적인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 버리는 홈런이었다.
9월 26일 시즌 60호를 쏘아올린지 5일만에 나온 61호 홈런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자녀로 태어난 Roger Maris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는 물론, 육상과 농구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만능 스포츠맨이였다. 여러 대학의 스카웃 제의를 마다하고 그가 선택한 곳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대학을 선택하는 대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만 5천의 금액을 기본금에  메이저리그 진입시 1만$의 보너스를 받는 조건으로 야구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빅리그로 가기 위한 과정인 마이너에서도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한시즌 30홈런을 치면서 마이너리그  MVP를 수상하였고, 이러한 성적에 힘입어 1957년 4월에 정식으로  메이저리그 선수로 데뷔를 하게 된다.그러나, 클리블랜드에서의 선수생활은 1년만에 끝나고 말았다. 당시 리그 상위권의 전력을 갖추고 있던 클리블랜드는 좀더 경험있는 선수들이 필요했다. 그 결과 당시 최고의 1루수 중 한명이였던 캔사스시티 A's의 Vic Power를 얻는 대신 Maris를 포함한 일부 선수들이 서로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된 것이다.

정확성은 다소 부족했지만, 젊은 Maris의 파워는 여러 팀에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A's로 팀을 옮긴지 1년 반만에 그는 다시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1959년 리그 3위에 머무른 양키스는 30대 노장선수들을 대체할 20대 초중반의 젊은피 수혈에 나섰다.

월드시리즈 퍼펙트 경기로 유명한 Don Larsen과 1950년대 양키스의 우익수로 눈부신 활약을 했던 Hank Bauer 등을 내주고 Maris 등 젊은 선수들이 양키스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맞이한 1960년, 첫 번째 홈경기에서 그는  보스턴을 상대로 2개의 홈런을 기록, 상쾌한 스타를 시작하였다.
Mickey Mantle과 3,4번을 번갈아가며 쏘아대는 홈런포는 리그 투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로 그 유명한  'M-M Boys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해 Matle은 40홈런으로 리그 홈런왕을. Maris는 비록 한개 적은 39개로 리그 2위를 차지했지만, 장타율 1위, 최다 타점(112타점)을 휩쓸며 생애 3번째 MVP에 도전하던 Mantle을 제치고 리그 MVP를 수상하였다. 온갖 부상으로 시달리던 Mantle이였지만, Maris역시 시즌 후반 갈비뼈 부상으로 20경기 넘게 결장하면서 100%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시즌이었다.

월드시리즈에서 Bill Mazeroski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1960년 시즌이 끝나고 1961년 새로운 해가 밝았다. 1961년은 10년 넘게 집권하며 5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의 금자탑을 일군 70세의 Casey Stengel 감독이 경질되고, 코치로 재직중인 Ralph Houk가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해였다.
Houk 감독은 3번에 Maris를, 4번 타순에는 정확성과 클러치능력이 뛰어난 Mantle을 고정시킴으로써 팀공격력의 극대화를 시도하였다.

여러면에서 솔직히 Maris는 3살 위인 Mantle에게 비교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향적인 Mantle과 다소 내성적인 Maris는 서로를 격려하는 절친한 동료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갔다. 시즌 출발은 Mantle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6월로 들어서자 숨죽이고 있던 Maris의 홈런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5월 24일부터 6월 22일까지 30일간 20개의 홈런을 몰아쳐 앞서고 있던 Mantle과의 격차를 조금씩 좁혀가고 있었다.

새로운 홈런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다.
8월초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던 Ford Frick은  "154경기내에서 홈런경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공식발표한 것이다. 기자출신으로 Ruth의 자서전과 회고록 등을 집필하며 Ruth와 돈톡한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Frick 이였기에 이러한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였나 싶다.

이런 와중에도 둘의 홈런 경쟁은 계속되었다.
8월초까지 근소한 우위를 보이던 Mantle이 8월 중순부터 잠시 주춤하자 Maris가 앞서기 시작했다. Frick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Maris가 8월 22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50호를 기록하였다. 이쯤되자 새로운 기록에 대한 팬들과 매스컴의 관심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Maris는 경기가 끝날 때마다 수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와 기자들의 마구잡이식 인터뷰공세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락커룸 밖에서 4,5시간씩 매스컴과의 전쟁에 힘을 빼야 했다. 게다가 Mantle이 팔부상과 무릎부상으로 홈런레이스에서 이탈한 후에는 모든 관심이 Maris 한 사람에게로 쏟아졌다.

다음날 경기를 위해서 잠을 청하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구단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그의 집앞 대문까지 와서 질문을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9월 중순쯤에는 하루에 2,3시간을 자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자신과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매스컴과의 싸움이었다.

홈런 페이스가 주춤한 가운데 Frick 커미셔너가 말한 154경기에서도 61호 홈런은 나오질 않았다.
155번째 경기에서 59호, 159번째 경기에서 60호가 나왔다. 앞에서 언급한데로 61호 홈런은 161번째 경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커미녀서의 주장대로 새로운 홈런 기록으로 깨끗하게 인정되지는 못했다. 그의 홈런 기록옆에 '*'표시가 붙게 된 것이다.

최종성적 61홈런, 142타점, 132득점으로 2년 연속 MVP를 수상하게 되고, 외야에서의 강력한 송구와 정상급의 수비력으로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야구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각종 사회단체에서 수여하는 상까지 거의 모조리 차지하였다. 한마디로 1961년은 Maris 개인을 위한 시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월드시리즈도 우승했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과연 Maris의 홈런기록이 정식으로 인정받기 힘든 것이였을까?
여기저기서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분명 출장경기수는 Ruth보다 10경기가 많은 161경기였지만, 타수가 아닌 타석에 있어서는 Ruth가 678타석, Maris가 684타석이였다. 고작 6타석밖에 차이가 나지를 않는 것이다.

또한, 양키스 구장의 우측펜스가 296피트로 타구장에 비해 짧아 좌타자에게 유리했다는 지적도 있으나, 1927년에도 295피트정도로 거의 똑같았다는 점이다. 원정경기에서 Ruth가 33개, Maris가 30개를 쳤다는 것도 Maris의 홈런기록 인정에 힘을 실어줄 만한 근거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1927년과 1961년의 아메리칸 리그 마운드의 질적인 측면을 따져봤을 때 1961년이 더 좋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Maris는 리그에서 10승 이상을 기록한, 한마디로 수준급의 선발투수들로부터도 36개의 홈런을 뽑아냈고 반면 Ruth는 33개를 기록하였다. 물론, 그 시대별로 상대적인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수치상의 단순비교로 이 두명의 홈런기록을 평가한다는 것은 문제가 될수 있다. 하지만, Maris의 61홈런이 새로운 홈런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낸 후 1962년에도 33홈런, 100타점의 성적을 기록하며 Mantle과 'M-M Boys'의 위력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Maris의 시대는 끝이였다. 1963년 오른쪽 손부상으로 배트에 힘을 싣지 못하면서 파워와 홈런수는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손에서 여러개의 뼛조각까지 발견되어 수술을 받아야 할 상태였다.

1965년 이후 부상병동 Mantle, Maris의 성적은 팀의 추락과 함께 같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구단은 팀의 재정비를 위해 하향세라고는 하지만 미전역 최고의 슈퍼스타인 Mantle은 남겨놓고, Maris는 카디널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카디널스에서 첫해, 정규시즌 성적은 별볼일 없는 것이였지만, 월드시리즈 베테랑 답게 7경기에서 7타점을 기록하며 팀에 우승선물을 선사하였다. 계속된 손부상으로 1968년 선수생활을 마감한 이후 Maris는 1984년 양키스 팀내 영구결번(#9)되었고, 오늘날까지 그가 남긴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Maris의 팬들은 2차례의 MVP 수상과 정상급의 수비력, 그리고 개인성적 보다는 팀성적을 위해 열심히 플레이한 점을 높이 평가해 명예의 전당헌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전문가들은 헌액되기엔 부족함이 있다고 지적을 한다. 2,3년의 짧은 기간동안 보여주었던 성적만으로 헌액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한때 ESPN의 메인 해설자로 활동했던 명예의 전당 회원 Joe Morgan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은 풋볼이나 농구처럼 쉽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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