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2-27 22:23:36, Hit : 64, Vote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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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의 에이스 Eddie Plank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최고의 좌완투수중 한명으로 평가받는 Eddie  Plank는 대학에 들어가기전까지 야구를 제대로 배운적이 없는 선수였다. 하지만, 투수로서의 소질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게다가 냉정할 정신력을 갖고 있어 투수로서 성공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게티스버그 대학에서 투수로서 주가를 높여가고 있을때 이웃 학교에 또 한명의 스타가 있었다. 그는 바로 후일 메이저리그  전국구 스타로 발돋음한 Christy Mathewson 이였다. 펜실바니아州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였던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월드시리즈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1901년 25세의 나이에 필라델피아 A's에 입단한 Plank는 첫해부터 기대이상의 성적을 내며 팀의 간판투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듬해 괴짜투수 Rube Waddell이 합류하면서 이 좌완듀오는 리그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Waddell처럼 타자를 압도하는 강속구도, 그렇다고 여러개의 변화구를 던지지 않았지만, 정확한 제구력과 완급조절, 그리고 타자들을 꼼짝못하게 했던 사이드암 딜리버리에서 나오는 커브로써 Plank는 감독에게 강한 신뢰와 인상을 심어줄수 있었다.

1902년부터 4년 연속 +20승을 기록했고,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4차례 더 +20승(총 8차례)을 거두면서 통산 326승으로 1960년대 Warren Sphan이 경신하기 전까지 메이저리그 좌완투수 통산 최다승기록을 보유하였다.

은퇴를 선언했던 1917년에는 4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피칭으로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었지만, 잦은 위경련 증세로 마운드를 떠난것이 조금은 아쉬울 따름이다.  만약 3,4년간 더 활약했으면 400승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생각이였다.

정규시즌 보여주었던 성적과 달리 Plank는 월드시리즈에서는 그다지 행운이 없었다.
그가 활약할 당시 소속팀 A's는 3차례의 우승을 거머쥐었지만, 정작 본인은 2승 5패의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렇다고 투구내용이 좋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상대 투수들의 호투에 팀타선이 침묵을 지켜 1실점 완투패를 당하는 경기도 간혹 있었다.

1905년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서는 18이닝 4실점을 하고도 2패를 당했다.  대학시절 라이벌이였던 Mathewson에게 첫 완봉패를,  그리고 철인 Joe McGinnity에게 또다시 완봉패를 당한 것이다.
6일동안 3차례의 완봉승을 거둘 정도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던 Mathewson을 상대하게 된 것이나, 무지막지한 투구이닝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McGinnity를 만난것이나 모두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경기였다.

1910년에는 시즌내내 괴롭혔던 팔꿈치 통증으로 월드시리즈 무대에 서보지도 못했다.
1914년 시즌후 Federal League(FL)의  공격적인 경영에 Mack감독은 선수들의 연봉이 천정부지로 오를 것으로 판단, 팀내 많은 선수들을 방출하였고, Plank 역시 St. Louis Terriers로 팀을 옮겨 39살의 나이에 21승을 올려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다.

1년간의 FL 생활을 끝내고 아메리칸 리그로 복귀, 2년간 세인트루이스 Brows에서 더 선수생활을 한뒤 은퇴하였으며,  1946년 베테랑 위원회(VC)를 통해 헌액되었다.

1863년 남북전쟁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게티스버그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고향을 위해 많은 사회활동을 했던 Plank는 경기가 없는 오프시즌에는 고향에서 전쟁유적지 관광가이드로 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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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의 안타제조기 Paul Waner
괴짜투수 Rube Wadd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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