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01 20:42:31, Hit : 69, Vote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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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트로이트의 슬러거, Hank Greenberg




1930년대 메이저리그 팬들은 Jimmie Foxx, Lou Gehrig, 그리고 Hank Greenberg, 이 3명의 1루수들이 연일 쏘아대는 홈런포에 열광하고 있었다. 나이로 보나 데뷔년도로 보나 세명중 가장 늦었던 유태인 혈통의 Greenberg는 1911년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학창시절을 뉴욕에서 보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키스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지만 그 당시 양키스에는 Gehrig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포지션인 주전 1루수가 되지 못할 바에야 다른 팀으로 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하에 디트로이트와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1930년 1경기에 잠깐 모습을 비추긴 했으나, 1932년까지 2년간 마이너에서 착실하게 과정을 밟았던 Greenberg는 22살이 되던 1933년부터 주전 1루수로 자리매김하며 12개의 홈런과 87타점으로 몇년간 팀의 구멍이었던 1루쪽에서 확실한 기대주로 인정받게 된다.

1934년 장타율이 6할대로 진입하며 홈런과 타점에서 급상승하였고, +200안타, 타율.339을 기록하며 MVP후보까지 선정되었다. 이해 팀은 리그우승을 거머쥐으며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여 당시 'The Gashouse Gang'이라 불리며 최강전력을 자랑하던 카디널스와 접전을 펼치게 된다. Greenberg가 1개의 홈런과 7타점의 매서운 공격력을 뿜어냈지만, 투수형제인 Dizzy-Paul Dean의 활약으로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한 아쉬움이 컸던지 1935년에는 36홈런, 170타점으로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Foxx, Gehrig을 제치고 만장일치로 첫 MVP를 수상하게 되었다. 특히,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만 25홈런, 103타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아직까지 그 어떤 선수도 깨지 못하고 있다.

팀은 다시 리그 정상을 질주하여 월드시리즈 우승에 재도전장을 던졌지만, 그는 2차전을 끝으로 모습을 감추게 된다. 2차전 7회 공격도중  태그아웃 시키려는 컵스의 포수 Gabby Hartnett와 충돌하여 손목부상을 당한 것이다.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우승을 거머쥐긴 했지만, Greenberg라는 팀의 핵심선수를  잃고 말았다.

1936년에도 불운은 이어졌다. 개막후 12경기만에 다시 상대선수와 충돌하며 손목을 다시 다쳐 몇개월을 재활에 매진해야만 했다.  가 없이도 팀은 리그 2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으나, 리그 우승을 한 양키스와 무려 15경기 이상 차이가 나며 Greenberg의 공백을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완전한 몸상태로 복귀한 그는 1년간의 긴 휴식기동안 체력을 비축하여 절정의 실력을 발휘, 40홈런183타점으로 리그 타점왕에 등극하며 장타율과 타격 등 도루를 제외한 공격 전부문에서 리그 Top-5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1938년에는 한 시즌 동안에만 11차례의 한경기 2개홈런을 포함하여 9월 27일까지 58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Ruth가 기록한 60홈런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남은 경기에서 하나도 추가하지 못함으로써 Jimmie Foxx와 함께 우타자 최다홈런 타이기록에 만족해야만 했다. 참고로 Greenberg가 이해 58개의 홈런을 기록한 이후 우타자가 이보다 많은 홈런을 친 것은 McGwire와 Sosa가 약물 홈런 레이스를 펼친 1998년이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Ruth의 홈런 기록 경신을 막기 위해 투수들의 고의적인 볼넷 남발이 있었다는 것이다.

1939년 경미한 발목부상으로 공격력이 다소 떨어진 그는 신예 Rudy York의 등장으로 이듬해인 1940년부터는 1루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보너스 연봉을 받는 조건으로 외야로 전향하였게 된다, 이해 생애 최고타율.34041홈런, 150타점으로 다시 한번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 두번째 MVP를 수상하였으며, 팀을 5년만에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켰다. 비록 팀은 우승을 하진 못했지만, 그가 7타점의 공격력을 발휘하였고, 디트로이트 팜시스템에는 Hal NewHauser와 같은 신인 투수를 비롯 잠재력 있는 타자들이 성장을 하고 있었기에 희망적인 시즌을 내다볼 수 있는 상태였다.

1941년 새로운 시즌을 맞이한 Greenberg는 19경기에서 12타점을 올리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2차 세계대전의 확전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여 군입대를 계획하게 되고, 7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발발하자 공군장교로 입대,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군입대붐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첫 선수가 되었다. B-29폭격기의 조종사로서 44년까지 아시아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결국 3년 반이라는 긴 시간을 군대에서 보내야 했지만, 그는 후에 회고하기를 "그 시기가 자신의 야구인생에 많은 어려움을 준건 사실이지만, 나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있었던 시간이었다" 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1945년 시즌 중반부터 그라운드로 복귀한 78경기에서 13개의 홈런을, 9월 30일 세인트루이스 Browns와의 경기에서  9회말 역전 만루홈런을 날려 리그 우승을 놓고 치열한 접전을 펼치던 세네터스를 제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컵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는 2개의 홈런과 7타점으로 두번째 우승트로피를 품안에 넣을 수 있었다.

또한, 1946년에는 44홈런127타점으로 다시 홈런과 타점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통산 4차례의 홈런왕과 타점왕을 달성하게 되었다.

시즌종료후 구단과의 연봉협상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자 Greenberg가 지나치게 많은 돈을 요구한다는 오해까지 생겼고 결국 디트로이트와 아쉽게 작별을 하게 되고 결국 NL의 피츠버그로 이적하게 되었다. 새로운 팀과 $100,000에 계약하면서 내셔널리그 최초의 연봉 10만불받게 된 그는 우타자인 자신을 위해 홈구장 Forbes Field의 좌측펜스 거리를 짧게 해준 배려에도 불구하고 25개의 홈런에 그치며 36살이 되던 그해에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선수시절 팀의 신출내기였던 Ralph Kiner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 Kiner가 7년 연속 리그 홈런왕을 차지하는데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다.

13년간의 선수생활을 접고 1948년부터는 클리블랜드의 팜시스템을 책임지며 많은 선수들을 발굴,육성하였고, 1956년부터는 화이트삭스의 부사장에 오르기도 했다. 군복무 등으로 인해 그리 길지 않았던 선수시절이었지만, 통산 379개의 홈런과 1,276타점으로 한 시즌 평균 38개의 홈런148타점의 매서운 공격력으로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5명만이 기록한 통산 +6할의 장타율등을 인정받아 1956년 84.97%의 득표율로 헌액되었으며, 1983년 디트로이트 팀내 영구결번(#5)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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