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01 22:05:22, Hit : 67, Vote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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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urt Flood, 구단의 트레이드에 이의를 제기하다




1969년 10월 7일,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카디널스는  주전포수 Tim McCarver, 그리고 팀내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인 중견수 Curt Flood 등 총 4명의 선수와 필리스의 슬러거 Dick Allen의 맞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하지만, Flood가 트레이드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다른 팀에서 뛰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이다. 이때부터 약 4년간 그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100년 넘게 지속되온 보류조항(The Reverse Clause)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어 대법원까지 사건을 가져갔고, 표면상으로는 그의 패배로 끝났지만 구단과 선수들간의 새로운 노사관계를 정립시키는 계기가 됨으로써 메이저리그에 새로운 혁신을 몰고왔다.

어려운 집안환경에서 성장한 Flood는 고등학교 재학 중 17세의 어린나이에 4천$의 계약금을 받고 신시내티에 입단하게 된다. 3루수로서 간간히 메이저리그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주전자리를 보장받지 못해 마이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중 1957년 신시내티는 두명의 투수를 받는 조건으로 카디널스로 그를 트레이드 시켰고, 이때부터 새로운 야구인생이 시작되었다.

당시 카디널스에는 리그 최고의 3루수였던 Ken Boyer가 확고부동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Flood에게는 외야수 보직이 떨어졌다. 1958년부터 주전 외야수로 출발을 시작한 Flood는 장타력을 갖춘 타자는 아니였지만, 삼진을 잘 당하지 않았으며 공을 맞추는데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 공격에서 나름대로 좋은 활약을 해주었고, 수비에서도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실력은 점차 향상되어 1961년 생애 첫 3할타율에 이른 이후 1963년에는 200안타까지 기록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211안타로 리그 최다안타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또한, 찬스에서도 강해 1965년에는 11홈런, 83타점을 기록하였다. 수비에서야 이미 검증된 상태라 63년부터 골든글러브를 거머쥐었고, 1965년 9월 3일부터 1967년 6월 4일까지는 227경기 연속 무실책의 내셔널리그 기록을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카디널스를 대표하는 팀내 주축선수답게 1967년에는 커리어 최고타율.335을 기록하며 1964년에 이어 2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계속된 상승세를 이어간 그의 명성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7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자 답지 않게 1968년 디트로이트와의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어이없는 수비실책으로 팀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고 만 것이다. Bob Gibson과 Mickey Lolich의 호투속에 0-0의 팽팽한 승부가 이어지다가 7회초 1사 1,2루의 상황에서 디트로이트의 Jim Northup가 친 평범한 외야플라이를 Flood가 놓침으로써 2타점 3루타가 되었고, 결국 팀은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도전에 실패하였다.

아쉬움속에서도 Flood는 이듬해인 1969년에도 변함없이 공수에서 좋은 활약을 하며 팀에 계속해서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팀에서는 좀더 파워를 갖추고 있는 타자가 필요한 상황이였다. 1969년 카디널스는 팀 평균자책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최강의 마운드를 갖추고 있었으나, 공격에서는 리그에서 가장 적은 팀홈런(90개)에서 보여지듯이 심각한 장타력 부재에 시달려 리그 4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방을 갖춘 슬러거가 시급한 상황이었고, 때마침 소속팀과 불협화음을 일으킨 필리스의 Dick Allen을 영입하기 위해 10여년간 팀의 간판으로 활약했던 Flood 등 4명의 선수 트레이드를 시도하였다.

이에 불만을 제기한 Flood는 처음에는 은퇴를 결심하기도 했지만,  이를 철회하고 Kuhn 커미셔너에게 자신을 자유신분으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100년 가까이 지속되온 보류조항을 깨뜨릴 수 없었다. 필리스 소속으로서 뛰라는 것이 그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였다.

결국, 법적투쟁을 벌이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글러브대신 서류가방을 들고 법정에서 4년간의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연방법원까지 가는 소송에서 법원은 보류조항을 지속시키는 대신 개선하겠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소송이 진행되는 기간중에 Flood는 필리스의 유니폼을 한번도 입지 않은채 세네터스(현 텍사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1971년 13경기만을 뛰고 은퇴를 하였다.

계속된 투쟁의 종지부는 1972년 6월 18일 대법원 상소기각으로 끝을 맺었다. 연봉 9만불을 받던 Flood는 변호사 고용비용 등 소송비용만 400만불이 넘는 돈을 퍼부어 비웃음까지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용기있는 행동덕분에 Catfish Hunter, Andy Messersmith, Dave McNally 등의 선수들이 보류조항을 완전히 흔들어 놓을 수 있었고, 결국엔 FA제도의 발판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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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류조항과 FA의 유래(펌 : Maxmlb ungurs)
보류조항은  1879년에 처음 등장하였다고 한다. 당시까지만해도 선수들의 이적이 자유롭던 시대이다보니, 재정이 빈약한 구단은 경기를 제대로 치룰 수 있는 최소한의 선수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경기를 치룰 수 있는 최소한의 선수에 대해 팀은 계약서상에 보류권을 명시함으로써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하는 규정이었다.

쉽게 말해 보류조항이 적용되는 선수들은 말 그대로 구단의 재산이 되는 것이고, 선수에 대한 모든 권리는 구단이 가지게 되며 은퇴했다가 복귀하는 경우라도 반드시 원소속 팀으로만 복귀해야 하는 것이었다.

제도화가 이루어지면서 1883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보류조항에 묶이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때문에 훗날 Player's League나 Federal Leaguer처럼 보류조항에 대해 반대하는 새로운 리그들이 창설되기도 했지만,  법원의 야구는 독과점 금지법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판결 덕분에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은 전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던 중 반전사상과 함께 자유주의의 물결에 휩쓸렸던 1960년대 후반 Marvin Miller라는 인물이 등장하였다. 1966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의 이사로 선출되며 뛰어난 두뇌와 수완을 자랑하던 그는 야구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맹활약하여 1969년에는 최저연봉 규정, 연봉 협상 대행권, 연금 확충 등을 얻어내었고, 1972년에는 파업을 통해 연봉 중재권을 얻어냈다. Miller의 공로는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무엇보다 큰 공로는 "선수들의 가슴속에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라는 의식을 심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Miller가 불은 지핀 가운데 Flood가 자신의 트레이드에 대해 소송을 걸었지만, 법원에서는 "야구는 독과점 금지법의 대상이 아니다" 라는 판결을 내려 그의 상소를 기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단체 협약이나 기타 입법 조치에 의해서 보류권 조항을 전복시킬 수 있다"라는 내용의 판결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수들은 또 다시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에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74년에는 Catfish Hunter 사건이 일어났다.
오클랜드 A's의 에이스 Hunter는 그해 구단주였던 Finley와 독특한 계약을 맺었다. 5만달러의 그해 연봉 중 절반을 구단에서 별도로 보험신탁을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시즌이 끝난 후 이 계약은 불공정 계약으로 연봉중재위원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해 12월 13일 Peter Seitz가 이끄는 중재위원회는 Hunter의 계약이 불공정 계약이므로 오클랜드 구단은 Hunter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없다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고, Hunter는 보류조항이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 자유계약권을 따낸 선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Finley는 법원에 소송을 걸었지만, 법원은 1972년 Flood 사건때의 판결문 중 단체 협약에 관한 조항을 들어 Finley의 소송을 기각하였다. 그리고 1974년 12월 31일 Hunter는 양키스와 5년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FA계약이 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수들이 FA자격을 얻게 된 것은 아니었다. 
1년후  보류조항을 뿌리채 뒤흔드는 유명한 사건이 터졌다. 바로 Andy Messersmith & Dave McNally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었는데, 1975년 다저스의 투수 Andy Messersmith와 볼티모어의 투수 Dave McNally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은 상태로 시즌을 뛰었다. 이들은 그해 시즌을 마친 후 구단이 자신들과 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로 시즌을 뛰었으므로 구단은 더 이상 보류권을 주장할 수 없다며, 중재 신청을 하였다. 중재위원회는 이번에도 선수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로써 거의 1세기동안 존속되어 온 보류조항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 Marvin Miller와 선수노조는 구단주 측과 4번째 단체협약을 벌였고, 그 결과  메이저리그에서 6년 이상 뛴 선수는 자유계약 선수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라는 규정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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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의 좌완 20승 투수 Dave McNally
디트로이트의 슬러거, Hank Gre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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