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02 20:46:09, Hit : 68, Vote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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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티모어의 좌완 20승 투수 Dave McNally




한 팀의 선발투수 3,4명이 시즌 20승이상의 성적을 기록한다면 그 팀은 당대 최강의 팀으로 군림할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볼티모어 선발진이 그러했다. 특히, 1971년에는 선발투수 4명이 모두 20승 이상을 기록하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평균자책점에서도 3명이 리그 Top-10에 이름을 올려 볼티모어 프랜차이즈 역사상 아니,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의 선발진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 선발진의 중심에는 20승을 무려 8차례나 한 Jim Palmer가 오랫동안 자신의 역할을 해내었으나,  20승 마운드의 시작 테이프를 끊었던 이는 바로 Dave McNally였다. 1942년 출생인 McNally는 1960년 볼티모어와 인연을 맺은 이후 1963년부터 팀의 제 5선발로서 메이저리그 투수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풀타임 첫해 7승 8패, 4점대의 평균자책점으로 잠재성을 확인했고, 이듬해부터는 좀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시즌을 거듭할수록 안정된 피칭과 함께 승수쌓기는 물론 평균자책점까지 2점대로 끌어내림으로써 팀으로부터 확실한 신뢰를 쌓아 나긴다.

타자를 윽박지르는 강속구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젊은 투수답지 않게 노련한 경기운영정교한 제구력으로 마운드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였던 그는 1965년 첫 2점대 평균자책점 진입을 한 이후,  1966년부터는 20살의 Jim Palmer와 함께 여러 선배투수들을 제치고 유일하게 팀내 +200이닝을 소화하며 에이스로서 성장하였다.

몇년후에 그 위용을 갖출 공포의 선발진에 비견될 만한 마운드는 아니였으나, 불펜진의 활약과 Frank Robinson, Boog Powell, Brooks Robinson의 공격력으로 팀은 세인트루이스에서 볼티모어로 연고를 옮긴 이후 첫 번째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는 쾌거를 올렸으며, 내셔널리그 최강팀인 다저스와의 한판대결을 벌이게 된다.

1차전에서 McNally는 Don Drysdale과의 대결에서 초반 부진으로 약간 실망스러운 스타트를 끊었지만, 불펜진의 활약과 Frank-Broosk Robinson의 홈런포 덕분에 패배를 면하였다. 4차전에서 명에회복을 위해 다시 나선 McNally는 1차전에 이어 다시 Drysdale과 한판대결을 벌여 9이닝 동안 4피안타 완봉승으로 1966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과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1966년 월드시리즈에서 Sandy Koufax를 제압했던 Palmer는 시즌 초반 잠깐 모습을 보이다가 2년 가까이 부상으로 신음하며 마운드에서 사라졌고, McNally역시 부상으로 인하여 많은 경기를 결장하게 됨으로써 데뷔 이후 최악의 해를 맞이하고 만 것이다.

선발진의 붕괴는 결국 팀성적의 추락을 가져왔다. 전년도 월드시리즈 우승팀에서 5할승률도 되지 않는 팀으로 전락한 볼티모어는 Hank Bauer를 경질히고 Earl Weaver로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하면서 대대적인 쇄신작업에 들어갔으며, 이러한 쇄신의 선봉에 McNally가 있었다.

전년도 부상으로 부진했던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1968년 22승(리그 2위), 평균자책점 1.95(리그3위)의 생애최고성적을 기록한 것이다. 비록, 사이영상은 31승의 Denny McLain에게 돌아갔지만, McNally를 팀의 에이스로서 다시금 인정하게끔 한 시즌이였다.

1969년 볼티모어는 McNally를 뒷받침 할 만한 투수인 Mike Cuellar를 휴스턴에서 영입하였고, 2년 가까이 부상과 재활로 고생하던 Palmer까지 시즌 중반부터 가세하자 업그레이드된 선발진을 갖추게 된다. McNally는 16연승의 질풍노도와 함께 20승 7패로 기대만큼의 성적을 기록하였고, 스크류볼의 달인 Cuellar은 23승으로 사이영상을 거머쥐는 태풍을 몰고왔다.

주축이 된 두 투수의 활약과 여전히 건재한 공격력에 힘입어 볼티모어는 프랜차이즈 최다인 109승으로 리그 우승을 가볍게 차지하였다. 미네소타와의 챔피언쉽 시리즈 2차전에서 연장 11회까지 11탈삼진의 위력을 보인 McNally의 호투로 팀은 월드시리즈 무대를 3년만에 밟게 되지만, 월드시리즈 2경기 16이닝동안 5실점한 그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어메이징 메츠' Jerry Koosman에게 두 경기에서 모두 패배함으로써 McNally의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반지 획득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실망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20승을 기본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막강 선발진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70년 24승으로 리그 공동 다승왕을 차지한 McNally와 Cuellar, 20승의 Palmer가 있었기에 팀은 108승으로 다시 리그 우승을 가볍게 거머쥐었고, 미네소타와의 챔피언십을 수월하게 통과한 후 신시내티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3차전에 완투승을 기록한 McNally의 활약에 힘입어 월드시리즈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특히, McNally는 상대선발 Tony Cloninger로부터 투수로는 최초로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만루홈런을 기록하는 공격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71년에는 샌디애고로부터 Pat Dobson을 영입하여 한층 선발진을 강화하였고, 20승을 밥먹듯이 하는 볼티모어 선발진의 영향이였는지 Dobson까지 자신의 커리어 유일한 20승을 하면서 무려 4명의 선발투수가 20승을 기록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McNally 21승, Cuellar 20승, Palmer 20승).

101승으로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월드시리즈 2연패도 가능할 것처럼 보였으나, 막상 두껑을 열어보니 당시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어렵게 풀려가고 있었다. 오클랜드와의 챔피언십에서는 손쉽게 이겼지만, Willie Stargell을 중심으로 가족같은 끈끈한 팀으로 정평이 나있던 피츠버그에게 역전패하고 만 것이다.
McNally는 1차전에서 완투승을 따내며 초반 기세를 잡았으나, Cuellar 등의 선발투수가 3,4차전을 모두 내주고 말았고, 5차전에서는 McNally마저 패하면서 결국 우승을 놓치게 되었다.

1972년에는 선발전원이 2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공격력이 무뎌지면서 McNally는 13승 17패로 5년 연속 도전한 20승에 실패하게 된다. 1973년 17승으로 다시 선발진에 힘을 실어준 그의 활약으로
볼티모어는 지구우승을 차지하였으나, 새롭게 리그 제왕으로 군림한 오클랜드와의 챔피언십에서 무너지며 팀과 그는 조금씩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McNally의 하향세를 재촉한 것은 매시즌 +250 이닝을 소화한 것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McNally가 보류조항에 대해 반발하면서 야구외적인 부분에 시간을 더 쏟아부었기 때문이였다. 1974년 16승의 활약을 한 그는 시즌 종료후 다저스의 투수 Andy Messersmith와 함께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채 시즌을 뛰었고, 시즌을 마친 후 구단이 자신들과 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로 시즌을 뛰었으므로 구단은 더 이상 보류권을 주장할 수 없다며, 중재 신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중재위원회는 1974년 오클랜드 Catfish Hunter의 손을 들어준 이후 다시 McNally와 Messersmith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이 두명의 선수가 100년 가까이 존속되어 온 보류조항을 사실상 유명무실화
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운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였다.

이러한 법적인 분쟁에 휘말린 McNally는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1975년 3승만을 기록한채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게 된다. 통산 184승 119패, 평균자책점 3.24, 4년 연속 +20승의 성적과 월드시리즈(4승)와 같은 큰 경기에서도 7승을 올려 볼티모어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 시대를 빛낸 팀원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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