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05 15:12:46, Hit : 71, Vote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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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dre Dawson, 꼴찌팀에서 사상 첫 MVP를 수상하다




1980년대 리그 최고의 외야수로 명성을 날렸던 'Hawk' Andre Dawson 은 소속팀의 전력이 시원치 않아서 월드시리즈 무대를 한차례도 밟지 못했다. 그것이 명예의 전당헌액에 오랜기간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20여년동안 보여준 그의 개인성적만을 감안한다면 쿠퍼스타운에 그의 이름이 오른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의 메이저리그 경력은 차분하게 시작됐다.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1975년 드래프트 10라운드에서 Dawsonn을 선택했다. 그렇게 각광을 받았던 선수는 아니였나보다. 그러나, 1977년 신인때 보여준 성적은 그렇지 않았다. 19홈런, 65타점으로 내셔널리그 신인상을 수상하며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Gary Carter에 이은 또 한명의  예고했다.

타자들에게 불리한 구장으로 평가받던 올림픽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음에도 Carter와 함께 만년꼴찌인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1980년대가 시작하자 소속팀은 지구 1위를 넘보는 강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특히, Dawson은 부상당하기 쉬운 홈구장의 인조잔디에서 매시즌 20홈런-20도루를 기록하며, 애틀랜타의 Dale Murphy와 함께 리그 최고외야수로서 매시즌 골든글러브 수상(8회)은 물론 올스타전(8회)에도 단골출전하는 스타선수로 발돋음 하였다.

하지만, 2년 연속 MVP를 수상한 Murphy가 타자들에게 유리했던 Fulton County Stadium을 사용했고, 백인이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Dawson이 조금은 불리한 입장이 아니였을까 싶다. 게다가 인조잔디 위에서 수많은 도루시도와 중견수로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광범위한 수비를 하다보니 1980년대 초반부터 잦은 무릎부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자기관리가 부족했다기 보다는 구장조건 등 외부적인 환경이 야구를 하기엔 Murphy보다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1983년 몬트리올 유니폼을 입고 최고성적(32홈런, 113타점)을 기록한 이후로 무릎부상의 후유증은 시즌을 거듭할수록 악화되었다. 성적도 조금씩 추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당시 Dawson 자신은 몬트리올 팀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지긋지긋한 인조잔디를 떠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무릎부상으로 매시즌30경기 이상을 결장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1985년 새로운 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이해 9월 24일 컵스와의 원정경기에서 5회에만 3점 홈런 2개를 기록하면서 한이닝 6타점으로 이 부문 메이저리그 타이기록을, 그리고 1978년 7월 30일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한이닝 2개의 홈런을 쏘아올린데 이어 다시 한번 한이닝에 2개의 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한이닝 2개의 홈런을 2차례나 기록한 것은 1977년 SF의 Willie McCovey이후 처음있는 일이였다. 몇년뒤 자신의 팬들이 될 컵스관중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셈이였다.

1986년을 끝으로 FA자격을 갖춘 Dawson은 숙원사업인 몬트리올 탈출을 부르짖으면서 다른팀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200홈런-200도루까지 가입한 선수를 데려가겠다는 팀이 하나도 나오질 않았다. FA선수들의 몸값을 크게 낮추려는 각팀 구단주들 사이의 사전답합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진상파악에 들어간 선수노조는 소송을 걸었고, Dawson을 포함하여 Tim Raines, Ron Guidry 등 일부 선수들이 새로운 팀과 계약하지 못할 경우 5월 1일까지 前소속팀과도 계약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몬트리올의 인조잔디 구장을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Dawson은 급할수밖에 없었고 결국, 전년보다 반이상 작은 65만$의 연봉으로 컵스와 계약을 하게된다.
새롭게 시작하게된 Wrigley 구장은 올림픽 스타디움과는 달리 타자들에게 유리한 구장이였고, 천연잔디라 부상의 위험도 이전보다 감소했기 때문에 Dawson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나 다름없었다. Dawson 자신도 Wrigley 구장에서 야구를 하는게 너무 즐겁고 평생 소원이였다고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컵스 유니폼을 입은 첫해, 1987년은 최고 전성기였다.
시즌 초부터 매서운 방망이를 뿜어대면서 한경기 2,3개 이상의 안타경기를 수차례, 한경기 3개 홈런(8월 1일 vs 필리스)까지 기록하면서 49홈런(리그 1위), 137타점(리그 1위)으로 카디널스의 유격수 Ozzie Smith를 제치고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다. 팀성적은 5할에도 미치지 못했고, 지구 최하위였음에도 그의 mvp 수상을 위협할만한 강력한 경쟁자도 없었기에 기자들의 표심은 그에게 갈수 밖에 없었다. 꼴찌팀에서 배출된 최초의 MVP였다.

1988년 부상후유증, 1989년 무릎수술로 잠시 주춤한 것을 제외하면 컵스에서의 선수생활은 그의 진면목을 재차 확인시켜준 시기였다. 한 경기 5개의 고의사구(1990년 vs 레즈)를 얻어낸 점과 타석에서 투수를 쏘아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는 상대 투수들에게 충분한 위협이 될수 있었다. 

1980년대 메이저리그 최고의 외야수 중 한명이였던 그도 나이가 들면서 수년간 괴롭힌 무릎부상 후유증으로는 은퇴기로에 놓이게 된다. 보스턴에서 통산 400호(1993년 4월 15일 vs 클리블랜드) 홈런을 기록하며 2년간 지명타자로만 뛰었지만, 젊은 시절 강력한 외야송구로 주자들을 잡아내던 모습은 아니였다.

Dawson이 태어나고 성장한 장소이기도 한 한 신생팀 플로리다 말린스를 끝으로 1996년 은퇴를 한 그는 고향에 계속 머물며 플로리다 말린스의 선수들을 위해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인조잔디 혐오증으로 팀을 떠났던 그를 위해 몬트리올 구단은  몬트리올 팀내 영구결번(#10)의 영광을 1997년 선사했다.

Andre Dawson은 300홈런-300도루, 그리고 8차례의 골든글러브 수상으로 공격력, 기동력, 수비력을 모두 갖춘 만능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인조잔디 구장이 아닌 천연잔디 구장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더라면 400-400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헌액투표에서 매번 떨어져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도전 9년만인 2010년 77.9%의 득표율로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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