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05 17:48:01, Hit : 74, Vote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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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의 왼팔 Sandy Koufax




Yogi Berra : Koufax가 어떻게 5패(1963년)를 기록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Hank Aaron : Bob Gibson, Warren Sphan 등 수많은 투수들을 보아왔지만, Koufax에 필적할 투수는 없었다.  
Willie Mays : 그가 어떤 공을 던질지 알고 있어도 난 한경기에서 2,3개의 삼진을 수차례 당했다.
Wille Stargell : 그의 공을 친다는 것은 포크로 커피를 마시는 격이다.                            
Ernie Banks :  나는 신이 던지는 공을 쳐야만 했다.
Mickey Mantle : 그의 투구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Sandy Koufax를 상대해 본 당대 최고 타자들의 말이다. 이밖에도 많은 선수들이 1960년대 전설적인 좌완투수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극찬과 평가를 내렸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가 활동한 1960년대가 투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대(예를 들어 오늘날보다 마운드가 8cm이상 높았다)였기 때문에 고평가되는 면도 있다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역대 선수들 중에 그 시대를 완벽하게 압도한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중의 한명이 바로 Koufax가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갑작스러운 은퇴와 이후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생활로 사람들은 그에게 더욱 신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에도 전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935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출생한 그는 2살 무렵 어머니의 이혼으로 새로운 아버지를 얻게 된다. 변호사이자 유태인이었던 양아버지 Irvin Koufax는 상류층의 인텔리였기에 자녀들에게 철저한 고등교육과 유태인 사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유태인들이 속한 단체(미국의 토크쇼 진행자였던 Larry King이 Koufax의 친구이다)등에서 스포츠와 학문을 익힌 그는 농구와 야구 등 다방면에서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Koufax자신은 운동선수보다는 건축가의 꿈을 소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구보다는 농구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야구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포지션이 적당한지도 처음엔 제대로 몰랐다고 Koufax는 회고했다.

1루수로 야구와 첫 인연을 맺었으나, 타격은 형편없다는 것을 알았고 나중에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져보니 남들보다 구위가 뛰어난 것을 알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후 신시내티 대학의 농구 장학생으로 들어가 야구와의 인연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중 우연한 기회에 마운드에 오른 야구경기에서 Koufax의 압도적인 모습을 지켜본 다저스의 한 스카웃터로부터 끈질긴 구애를 받고 1954년 $14,000의 계약금을 받고 야구와의 본격적인  인연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프로는 아마추어와 달랐다. 비록, Koufax의 공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만큼 빠르고 위력적이었으나, 제구력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타자들이 볼과 스트라이크를 손쉽게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들쭉날쭉한 컨트롤이 문제였다. 초창기의 Koufax는 제구보다는 빠른볼로  타자를 압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 공을 뿌릴 때마다 더 빠르고 강한 공을 던지겠다는 생각으로 데뷔후 몇시즌동안 그렇게 보냈다.

다저스가 LA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본격적으로 선발로테이션에 합류하긴 했으나, 투구스타일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간혹, 제구력이 좋은 날에 등판했을 때에는 10개 이상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투구를 보여주기도 했다. 1959년 6월 22일 필리스를 상대로 16탈삼진(야간경기 최다탈삼진), 2개월이 지난 8월 31일 Giants를 상대로 18개의 탈삼진을 올린 것은 단적이 예라고 볼 수 있다.

특히, 18탈삼진은 Dizzy Dean이 가지고 있던  내셔널리그 기록 17탈삼진을 경신한 것이였고, Bob Feller가 보유하고 있던 메이저리그 전체 기록과 타이를 이루는 놀라운 것이였다.
이쯤되다 보니,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고 구단에서도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젊은 투수를 제대로 키워야겠다는 의지를 가질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955년 데뷔후 1960년까지의 성적은 36승 40패, 평균자책점도 4점대 초반에 머무르는 별볼일 없는 투수에 불과했던 그에게 1961년 대대적인 수술이 이루어졌다. 투수코치 Joe Becker, 구단기록원 Allan Roth, 그리고 팀의 백업포수 Norm Sherry가 Koufax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 위해 스프링캠프부터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Becker코치와 Roth 기록원은 빠른볼과 변화구를 던질때의 투구폼이 다르다는 것을 감지하여 이를 수정하도록 했으며, 또한 좌타자에게 강한 여느 좌완투수와는 달리 좌타자에게 약점을 보이는 그에게 커브 그립 조정과 손목의 회전 등을 변화시켜, 낙차가 크며서 좌타자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를 개발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한편, Sherry는 Koufax의 룸메이트를 자청하여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의 정신적인 약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95mph을 상회하는 불같은 강속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다소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이였던 Koufax에게 Sherry는 마운드에서 많은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고 쉽게 던질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무조건 강하고 빠르게 던지려는 생각을 버리고 스트라이크를 넣는것에만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을 했다.
"너가 던진 공이 치기쉽게 한가운데로 들어온다고 해도 손쉽게 칠 타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라며 Koufax에게 자신감을 계속해서 심어주었다.

스프링캠프에서의 훈련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마침내 진정한 투수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이다.
데뷔이후 최다승인 18승과 269 탈삼진으로 생애 처음으로 리그 최다탈삼진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예기지 않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투수로 새롭게 눈을 뜬 것은 훈련의 긍정적인 효과였지만, 좌타자용 커브는 팔꿈치에 무리를 가져왔다.

1962년 처음으로 생긴 왼쪽팔의 일시적인 마비증세는 예전에는 없던 것이였다. 또한, 왼손 집게손가락 골절부상으로 이해 7월이후부터 약 한달 반 가량은 아예 마운드에 오르질 못했다. 후유증은 1963년 시즌 첫 한달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우려와 걱정속에 그는 1962년 4월 24일 컵스를 상대로 생애 2번째로 18탈삼진 경기를, 그리고 6월 30일에는 신생팀 메츠를 상대로  생애 첫번째 노히트경기를 기록하며 리그를 평정해가기 시작했다.

1963년, 팔꿈치 통증의 후유증은 시즌 내내 경미하게 나타나기도 했지만, 집게손가락 골절부상은 완전히 회복됨으로써 조금은 수월하게 피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 9월 카디널스를 상대로 시즌 11번째 완봉승으로 내셔널리그 좌투수 한시즌 최다완봉승은 물론 전년도에 자신이 수립했던 리그 최다탈심진을  다시 갈아치웠다.

이렇게 시즌 내내 위력적인 투구를 한 결과 25승 5패, 평균자책점1.88, 탈삼진 306개로  트리플 크라운, 사이영상, MVP를 독식하였고, 전년도에 이어 다시 생애 2번째 노히트 경기를 달성하였다. 게다가 라이벌이였던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 Juan Marichal을 상대로 거둔 기록이였기에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였다.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는 더욱 그의 존재를 높인 경기였다.
월드시리즈 우승청부사인 좌완 Whitey Ford와의 1차전 원정경기에서 1회부터 2회 2사까지 5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당시 월드시리즈 기록인 15탈삼진을 기록, 완투승을 거두게 된다. 4차전에서도 다시 맞붙은 Ford에게 또 완투승을 거둠으로써 월드시리즈 MVP까지 수상하여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였다. 양키스 팬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Mickey Mantle, Roger Maris 등 당대 최고의 타자들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Koufax앞에서는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했다.

1963년 한시즌 동안 300이닝 이상을 투구하며 다소 무리한 한 결과는 1964년 바로 나타났다.  6월 4일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생애 3번째 노히트 경기를 수립했지만, 8월에 들어서자 왼쪽팔꿈치 통증이악화되면서 시즌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매경기 등판후 팀닥터와 함께 라커룸에서 2,3시간씩 얼음찜질을 하곤 했지만 통증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시즌을 한달여 남겨놓은 시점에서 19승 5패, 223탈삼진, 평균자책점 1.74 등의 성적을 감안한다면 최소 7,8차례의 등판이 남았다고 가정했을때 어떤 성적이 나왔을까 하는 것은 말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61년 이후 매시즌은 팔꿈치 통증과의 싸움이였다.
한시즌 괜찮다 싶으면 다음 시즌에는 팔에 무리가 왔고, 시즌을 완벽하게 채우지도 못해다. 이러한 악순환의 사이클에 따라 1965년은 다시 별탈없는 건강한 시즌으로 마감할 수 있었다.
3년 연속 시즌당 한차례씩 노히트를 기록한 Koufax는 9월 9일 컵스를 상대로 퍼펙트경기를 수립하며 4년 연속 노히트 경기를 달성하였고, 시즌 최종성적 26승 8패, 382 탈삼진, 평균자책점 2.04로 2년만에 트리플 크라운사이영상을 다시 차지하게 된다.
리그 MVP는 샌프란시스코의 Willie Mays에게 내줬지만....

마운드에서 독주를 한 Koufax와 팀동료 Drysdale의 활약에 힘입어 다저스는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 2년만에 다시 우승에 도전을 하였다. 상대팀은 미네소타 트윈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1차전이 열리는 열리는 10월 6일, Koufax가 등판을 거부한 것이다. 그를 괴롭혔던 팔꿈치 문제가 아니였다. 사람들은 더욱 의구심을 자아낼 수 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Yom Kippur라는 유대인 사회의 안식일이 바로 10월 6일이였던 것이다. 유태인들은 이날에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디트로이트의 슬러거 Hank Greenberg가 욤키퍼로 팀관계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한 이후 거의 처음 있는 일이였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팀전체에 영향을 주는 그의 행동에 대한 비판과 프로정신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비아냥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매스컴과 일부팬들의 비난속에서도 구단 관계자들과 Koufax를 진정으로 좋아했던 팬들은 그가 등판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차전은  Drysdale이 등판을 했으나 패했고, 10월 7일 2차전 Koufax가 마운드에 올랐지만, 그 역시 5실점(비자책 4점)하며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2연패로 분위기가 몰리자 그에 대한 비난이 지역언론 등을 통해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난을 무마시키기 위해선 실력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5,7차전에서 보여준 투구는 역시 Koufax였다. 
5차전 완봉승, 7차전에서도 마지막 22타자 중 20타자를 범타로 처리하면서 5차전, 7차전 2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하며 결국엔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3경기에서 24이닝동안 29탈삼진으로 완벽하게 미네소타 타선을 틀어막은 것이다. 월드시리즈 MVP도 당연히 그의 것이였다.

1965년 시즌이 끝나고 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와 Drysdale은 3년간 100만$이 넘는 계약(Koufax는 13만, Drysdale은 10만 5천$)을 체결하며 Willie Mays에 이어 메이저리그 2번째 고액연봉 선수로 올라서게 된다. 자신이 보여준 성적에 합당한 대우였다.

1966년은 전년도와 비교해서 별반 차이없는 위려적인 투구내용이였다.
6월에는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당시 리그 기록인 7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았고, 19세기 Amos Rusie 이후 처음으로 개인통산 시즌 3번째 300탈삼진을 달성하며 27승 9패, 평균자책점 1.73, 탈삼진 317개생애 3번째 트리플 크라운사이영상을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팔꿈치 통증이 시즌이 끝날 무렵 심해지기 시작했다.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1회용 깁스와 수차례의 얼음찜질로 통증완화를 위해 팀닥터와 부단한 노력을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볼티모어와의 월드시리즈 2차전에 선발등판하였고 20살의 Jim Palmer를 상대로 6이닝만을 던진채 패전투수가 되었다.

에이스의 부상으로 다저스는 한경기도 이기지 못한채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월드시리즈가 끝난후 한달여가 지난 1966년 11월 Koufax의 팔통증을 지켜본 여러 의사들은 그에게 은퇴를 권유하였다. 계속해서 마운드에 오를 경우 왼팔을 평생 쓰지 못하는 상황까지 우려된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결국, 1966년 11월 18일 '황금의 왼팔' Sandy Koufax는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당시 그의 나이 30세였다.

투수로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는 시점에서의 갑작스러운 은퇴라 많은 야구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Koufax는 NBC방송사와 계약을 맺어 방송해설자로 잠시 나서기도 했지만, 선수시절 만큼 화려한 주목을 받진 못했다. 입담이 별로가 아니였나 싶다.

1972년 36세의 나이에 최연소 헌액(86.87%)으로 잠시 매스컴에 모습을 비췄던 그는 타고난 운동신경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위대한 투수가 될수 있었다. 술,담배는 거의 하질 않았고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골프마저도 시즌중에는 절대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까지도 선수생활을 위해 미루었다고 할 정도이니 만약 부상만 없었더라면 상상할수도 없는 성적을 기대해도 무리가 아니였을 듯 싶다.

선수시절 누렸던 행복과 명예와는 달리 2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진 못했고, 전부인들과의 사이에 자식들도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03년 다저스와 같은 계열(News Corp)이기도 한 뉴욕 포스트가 자신을 동성연애자라고 보도한것에 대해 분노하여 다저스와 인연을 끊겠다는 발언을 하여 한때 다저스 구단에 비상이 걸렸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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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Comiskey, 혁신적인 선수에서 악덕구단주로.
Andre Dawson, 꼴찌팀에서 사상 첫 MVP를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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