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06 21:54:01, Hit : 64, Vote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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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rlie Comiskey, 혁신적인 선수에서 악덕구단주로.





출처 : 이종률 해설위원의 '영화보다 재미있는 메이저리그 이야기"

시카고의 명망있는 집안출신으로 Charlie Comiskey의 아버지는 시카고에서 영향력있는 시의원이자 사업가였다. 아일랜드 혈통으로 시카고 토박이였던 그는 어린 시절 배관공 견습생으로 일했으나 관심은 오로지 야구에 있었다.

17세이던 어느날, 그는 아버지가 일하는 건축공사장에서 벽돌을 배달하기 위해 트럭을 몰고 가다 야구 경기를 보고 끼여들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야구를 하고 있는 아들을 찾아냈다.
그러나 아들의 맹활약을 지켜본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트럭을 몰고 공사장으로 향했다.

이후 Charlie Comiskey는 아무 걱정없이 야구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60$의 월봉을 받고 17세때 프로세계에 몸을 담은 뒤 오랜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882년 American Association(AA)의 St.Louis  Brown Stockings에 1루수로 입단한다. 그리고, 이듬해부터는 감독을 겸직하게 되는데 4년 연속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소속팀의 구단주는 물론 여러팀의 야구관계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었고, 야구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알리기 시작했다.

1890년 Player's League, 1891년 AA로 복귀한 이후 재정난으로 여러개의 리그가 붕괴하자 내셔널리그의 신시내티 레즈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선수와 감독생활을 이어나갔다. 1루수로 활약했던 그는 지금의 1루수 플레이를 고안했다. 이전까지 1루수는 자기 루에 바짝 붙어서 다른 야수의 송구를 기다려야 했다. 1루수 오른쪽 땅볼은 무조건 2루수가 잡아야 했다.

그는 베이스에서 뒤로 떨어져 오른쪽 왼쪽 땅볼을 모두 책임지고, 1루가 빌 때는 투수가 1루를 커버하는 시스템을 고안해 수비형태의 혁명을 이뤄냈다. 지금이야 별개 아닌 것이지만 당시에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신시내티에 있으면서 Comiskey는 평생친구이자 나중에는 원수 사이가 되어 버린 Ban Johnson을 만나게 된다. 당시 신시내티에서 야구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Johnson을 만나면서 Comiskey는 틈만 나면 야구의 미래와 자신들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1894년 Comiskey는 시즌을 끝내고 다음 시즌을 대비한 선수 스카우트를 위해 마이너리그를 순회하던 중 Western League라는 마이너리그가 재정난으로 해산 위기에 있는 것을 알고 구단주들을 설득하여 친구 Johnson을 회장으로 영입하고 리그를 재건할 것을 권유한다.

스카우트 업무는 안하고 엉뚱한 일만 하고 다니는 감독을 그냥 놔두는 구단주는 없다. 게다가 신시내티의 구단주 John Brush는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를 써온 Johnson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Comiskey가 Johnson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바로 감독직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러나, 감독직에서 물러난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해임후 그는 마이너리그 구단을 매입해 경영자로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해임한 Brush 구단주와의 보이지 않는 전쟁도 앞으로 치루게 된다. Brush는 아메리칸 리그를 붕괴시키기 위해 내셔널리그의 선봉주자로 나섰고, 1902년에는 뉴욕 자이언츠를 매입, Ban Johnson과 대립관계에 있던 John McGraw를 감독직으로 앉히는 등  아메리칸 리그 타도에 적극 나섰으며, Comiskey 역시 우수한 선수들을 내셔널리그로부터 빼앗아와 양대리그의 불꽃튀는 경쟁에서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구단과  리그 운영에 자신을 갖게 된 Comiskey는 1900년 메이저리그로 도약하기 위해 시카고 컵스가 지배하던 대도시 시카고로 구단을 옮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메이저리그 구단인 컵스가 제시하는 가혹한 조건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무때고 컵스가 선수를 달라면 내주어야 했으며, 컵스 구장 부근에서는 경기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심 메이저리그로의 승격을 추진하던 계획은 비밀로 하고 일단 시카고에 터전을 잡는다. 바로 그 해 Western League는 아메리칸 리그로 이름을 바꿨다. 아메리칸 리그가 내셔널리그와 전쟁을 벌이던 시절 Comiskey는 내셔널리그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적극 지원했다.

팀의 간판선수인 Clark Griffith를 신생 뉴욕 하이랜더스(現 양키스)에 조건없이 양도한 것도 내셔널리그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조치였다. 그의 탁월한 경영에 힘입어 화이트삭스는 컵스를 누르고 시카고를 대표하는 구단으로 성장했다. 1906년 월드시리즈에서는 양팀이 격돌하여 화이트삭스는 4승 2패로 컵스를 격파함으로써 Comiskey의 한을 풀어 주며 신생 아메리칸리그의 성과를 높인다.

1910년에는 최초의 야구장다운 야구장 Comiskey Park를 75만$을 들여 건설하고, 1913년에는 도쿄, 마닐라, 홍콩, 런던 등 세계일주 야구원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업적으로 성공한 이면에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 했던 선수들의 눈물이 감춰져 있다. 선수출신 구단주로 선수들의 불만을 가장 잘 알면서도 그는 선수를 돈버는 기계로 취급했다. 적십자 기금에는 총수입의 10%를 기꺼이 내면서도 선수 연봉은 쥐꼬리만큼밖에 주지 않았다.

당연히 선수들은 도박사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블랙삭스'란 별명은 1919년의 사건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구단주가  유니폼 세탁비조차 제대로 주지 않자 선수들은 항의의 표시로 몇주씩 유니폼을 빨지 않고 그대로 입었다. 이 더러운 유니폼에서 생긴 것이 블랙 삭스란 별명이다.

불세출의 타자라고 불리던 Joe Jackson의 연봉이 불과 6000달러에 불과했을 정도였다(당시 웬만한 스타플레이어들의 연봉은 1만 달러가 넘었다).
Comiskey의 악랄한 연봉정책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일화가 1917년에 있었다. 당시 에이스 투수였던  Eddie Cicotte는 시즌 30승을 거둘 경우 Comiskey로부터 1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기로 계약했다. 그리고 그해 9월이 시작되기도 전에 Cicotte는 28승을 올렸고, 시즌이 한 달이나 남은 상황에서 2승을 더 올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Comiskey는 Cicotte가 28승을 거두자 감독에게 압력을 넣어 그가 남은 경기에서 출장하지 못하도록 해버렸다. Cicotte는 1919년에도 29승을 올렸으나 여전히 연봉은 6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선수들의 간식비도 타구단에 비해 적게 지급되었다. 몇푼이라도 아끼려는 노력이 여러 곳에서 드러났다. 또, 1918년에는 전쟁 때문에 관중이 줄었다는 이유로 연봉을 삭감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다시 관중이 늘었지만 연봉을 올려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Comiskey가 필라델피아 A's에서 영입한 Eddie Collins에게는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선수의 두배가 넘는 1만 4천 5백$을 주자 선수들은 화가 나 도박사들에게 돈을 받고 경기를 져 주기로 음모를 꾸몄다.

Chick Gandil은 평소에 알고 있던 도박사 Sullivan에게 8만$를 주면 화이트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지도록 하겠다고 제의해 약속을 받아냈다. 이를 동료 선수들에게 이야기하지 선수들은 먼저 돈을 보여 줄 것을 요구했고, Sullivan은 4만$을 먼저 주고 경기가 끝나면 나머지를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Sullivan은 도박사들에게 모은 돈 4만$중에서 3만$는 자기 이름으로 돈을 걸었고, 정작 선수들에게 준 것은 1차전 선발로 예정된 Cicotte에게 준 1만달러가 전부였다. 선수들에 대한 투자는 아끼면서도 승부조작에 대해 단서를 제공하는 시람에게는 2만$이나 되는 돈을 걸었다.

하지만 이 비밀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 게 되었다. 화이트삭스가 경기를 져 줄 것이라는 설은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 버려 도박의 배댱률은 자꾸 떨어졌고 내분까지 일어나 엉망이 되어 버렸다. 우여곡절끝에 화이트삭스는 3승 5패로 월드시리즈에서 패했고, Sullivan은 나머지 4만$가운데 유격수 Swede Risberg에 1만$, 3루수 Fred McMullin에게 5천$를 지급했다. 주동자인 Gandil은 총 3만 5천$를 챙겼는데, 그의 1년 연봉은 4천달러였다.

계약서에 'X'로 서명했던 일자 무식의 Joe Jackson은 한푼도 받지 못했다. 그는 사실 월드시리즈에서 타율.375과 6타점을 올려 시카고가 지는데는 별 보탬이 되지 않았다.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승부조작을 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1920년 시즌은 다시 시작되었고, 화이트삭스는 우승 후보였다. 그러나 쿡 카운티의 배심은 1920년 9월 화이트삭스와 필라델피아 A's와의 3연전에서 또 승부조작의 의혹이 생기자 조사에 착수했고, 1919년의 사건까지 수사를 확대했다. 일리노이 주 법정은 승부조작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어 선수들이 자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처벌을 내릴 수 없었다.

Comiskey 역시 괘씸하게 생각했지만 자신의 재산인 선수들이 경미한 처벌을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메리칸 리그 회장 Ban Johnson은 친구에서 원수가 된 Comiskey에게 타격을 줄 기회로 철저한 수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내셔널리그는 타협안으로 '재론의 여지가 없는 명성을 가졌으며 야구계에 종사하지 않는', 그리고 '어떤 형태로도 야구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으로서 '단순히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공공의 이익이 보장될 수 있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모든 부조리가 사라지게 할' 정도의 강력한 지도자 한 사람으로 내셔널 커미션을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Johnson은 자기가 마음대로 주물러 오던 내서널 커미션을 없애는 것에 대해 반대했으나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여 1921년 야구 커미셔너 제도가 새로운 협정체결과 더불어 탄생한다. Kenesaw Mountain Landis 연방법원 일리노이 북부 지구 판사가 초대 커미셔너로 취임했다.

열광적인 야구팬이던 Landis는 '제소 또는 본인의 재량에 따라 야구의 최선의 이익에 이익에 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항에 대해 조사하고 지시, 재정, 처벌을 결정하고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Landis는 취임하자마자  화이트삭스의 관련선수 8명 전원을 야구계에서 영구추방했다.

이 사건으로 화이트삭스는 전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1931년 타계하기까지 30년동안 팀의 구단주로 있으면서 화이트삭스는 예전같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기 까지는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능할 수 있었다.

악덕 경영주와 같은 모습으로 많은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메이저리그 발전에 공헌한 것이 그의 치부를 완전히 덮어버렸기에 1939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Louis Comiskey, 그리고 여성 최초의 구단주이기도 한 며느리 Grace Comsikey로 구단경영이 이어졌고, 손자인 Charlie Comiskey 2세가 구단주로 있던 1959년, Comiskey 2세의 친누이이자 Charlie Comiskey의 손녀인 Dorothy Comiskey가 230만$에 Bill Veeck- Hank Greenberg에게 구단을 매각하면서 60년동안 지속된  Comiskey가문의 화이트삭스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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