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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경쟁자 Billy Martin





2002년 게시된 엠엘비파크의 됴댜룡(?)님의 글을 참고로 작성한 글입니다.

1950년대 양키스의 2루수 출신 Billy Martin은 메이저리그에 몸을 담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여러 차례 시비를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술집에서 술마시는 사람과도 시비가 붙기도 하였다. 선수시절 후반 5년간 무려 7개의 팀을 돌아다녔고, 감독으로서 12년간 5개 구단을 떠돌아 다니며 방랑생활을 했다.

그의 왜소한 체격과 유년시절의 환경이 그를 냉혈한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3번 바꿨고, 그는 외할머니의 손에 길러졌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만에 인접한 웨스트 버클리라는 곳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반대쪽에는 캘리포니아대학 주변으로 부자집들이 들어찬 언덕이 바라보였다고
한다. 그의 외할머니는 집에서 담근 포도주를 팔아서 생계를 꾸려갔고, 왜소한 Martin은 항상 동네 양아치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우리동네는 거칠기 짝이 없었소..1940년대에는 길거리가 온통 깡패투성이였는데 그들한테 주먹으로 싸워서 이겨야만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더랫소.."


당시 독립리그 오클랜드 산하 팜팀이었던 아이다호 펄스(Idaho Falls). 그에게 가방과 옷을 살돈 280달러를 주고 입단테스트르 받게끔 했다. Martin은 고등학교때 미식 축구, 농구를 약간 하기도 했지만 그가 열정을 쏟은 운동은 역시 야구였다.

오클랜드 산하 마이너팀과 계약을 했고 정말 열심히 뛰었다.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악착같이 대들었으며 체격이 빈약한 약점은 두뇌플레이로 커버했다. 홈런타자는 아니였지만, 그의 실력은 1946년 한때 최고점에 올라 132경기에서 타율.392, 230안타, 31도루, 174타점을 올린 적도 있었다.

1948년 Martin은 소속팀인 Oakland Oaks에서 Casey Stengel 감독을 만나 팀을 퍼시픽 코스트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승부욕을 눈여겨본 Stengel 감독은 Martin을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사랑하고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949년 Stengel이 양키스 감독으로 부임하자, Martin도 이듬해 1950년 양키즈로 바로 스카웃되어 메이저리그 선수생활의 돛을 올렸다.

첫 시즌 34게임에서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무엇보다도 항상 존경해온 선수 Joe DiMaggio와 친교를 맺게되서 기뻤다고 한다. 1951년 봄 양키즈 팜에 나타난 갈색머리의 괴물 신인 Mickey Mantle은 항상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반면 Martin은 거의 불량배처럼 거칠었고 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실 이 둘은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따지고 보면 악연이었다. 신문용 1면에 난 기사에도 Mantle은 항상 수줍음을 잘타고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촌놈(hick-이표현은 나쁜 뉘앙스가아님)이라고 하며 뉴욕시민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Martin은 말이 거칠며 도전적이어서 '빌리 더 키드 (Billy the kid)'라고 대문짝하게 실리기도 했다.

1952년 5월 보스턴의 괴짜선수 Jimmy Piersall(자신의 통산 100호 홈런기록후 뒷걸음질로 홈을 밟았고, 상대팀과 관중들의 성질을 돋우는데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과 경기전 한바탕의 주먹다짐으로 Martin의 주먹은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물론, 야구실력에서도 인상적인 경기를 몇차례 보여주었다. 특히, 월드시리즈에서의 수비는 그의 이름을
더욱 알리는데 효과적이었다. 1952년 월드시리즈에의 다저스와의 마지막 경기 최종7차전,
4-2로 리드하는 가운데 7회 2사 만루의 위기가 양키스에게 찾아왔다.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Jackie Robinson.
투수 Kuzava가 던진 공을 받아친 Robinson의 타구는 1루수와 2루수, 그리고 투수사이의 삼각지대에 떠오른 내야플라이가 되고 말았다. 1루수 Joe Collins가 잡아야 하는 상황이였지만, 그가 바람때문에 타구방향을 놓치는 와중에 3루수 Gil McDougald, 투수 Bob Kuzava가 모두 공의 방향을 잃고 순간적으로 내야진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2루수였던 Martin은 재빨리 뛰어들어가  간신히 그공을 잡음으로서 패배의 위기에서 팀을 건져내어 팀의 우승을 지켜냈다.

1953년에는 커리어 최고인 15홈런, 75타점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전까지 참가하였고,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는 타율.500, 2홈런, 8타점, 그리고 당시 메이저리그 기록인 12안타를 몰아치며 시리즈 MVP를 거머쥐었다. 특히, 12번째 안타는 6차전 끝내기 결승타였기에 그 가치는 더했다.

이후 그는 월드시리즈의 사나이로 불리며 인생에 꽃을 피우는가 했지만, 1954년 1년간의 군복무를 끝내고 돌아온 이후부터 그렇게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57년 5월 16일 Martin의 29번째 생일파티를 위해 Yogi Berra, Hank Bauer, Mickey Mantle 등과 함께 부부동반으로 당시 가장 유명한 맨하탄에 소재한 나이트클럽 Copacabana(코파가바나)에 술을 마시러 갔다. 그런데 밤늦은 시각에 Bauer와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결국 일행은 옆테이블 사람들을 때려 눕혔고 그 '코파카바나 사건'으로 철창신세를 지게돼 이튿날 아침 신문에 일제히 대서 특필됐다.

당시 양키스의 Weiss 단장은 Marin을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그는 평소에도 Martin을 미워했으며 그가 귀여워했던 Mantle에게 '나쁜 물'을 들인것으로 알고있었다.
(사실 Martin은 싸움이 벌어진 현장 가만히 있었고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Mantle을 보호해 주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Mantle은 양키즈가 애지중지하는 보물이었고 Weiss 단장은 이 사건이야말로 Martin을 처치할 호재로 여겼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의 희생양은 Martin이 되고 말았다.

이제부터 그의 유랑 인생은 시작된다.
트레이드 마감시한 6월 15일 Weiss 단장은 Martin을 캔자스 시티로 트레이드 해버렸다. 1958년 그는 디트로이트로 팔려갔다. 그리고, 1959년에는 클리블랜드로 팔려갔다. 1960년에는 신시내티로, 1961년에는 브레이브스에서 미네소타로 팔려나갔고, 결국 33살의 나이에 선수로서 은퇴를 택하였다.

신시내티에서는 또 한번의 사고를 치기도 하였다.
1960년 8월 4일 시카고와의 경기에서 Martin은 컵스의 신인투수 Jim Brewer의 위협구에 불끈하여 마운드로 손살같이 올라가 몇차례의 주먹을 날려 그의 광대뼈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Martin은 피해
배상 소송에서 패소, 10만$를 물어야했고 무지막지한 폭력배로 완전히 낙인찍히게 된다. 싸워서 진적이 없었으니..

그가 지도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싸움질 잘하는 사람이라는 딱지가 그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기회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1965년 미네소타의 Sam Mele 감독은 그에게 3루코치 자리를 제의했고, 당시 스카우터로의 진로를 생각하고 있던 Martin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해에 미테소타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구단은 이후 그에게 트리플 A팀인 덴버 감독을 맡겼고, 7승 22패로 바닥을 해매던 덴버는 그해 58승 28패를 거두는 기적을 연출한다.

1968년 미네소타 트윈스가 7위에 머물자 구단은 지도자로서의 실력이 검증된 Martin을 메이저리그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다음해 1969년 그는 97승으로 팀을 지구 1위로 올려놓았고, Jim Perry, Dave Boswell 등 2명의 20승투수까지 발굴했다. 그러나 시즌 직후 해임당했다.

미네소타 경영진 가운데 일부인 Howard Fox를 Martin은 1969년 시즌중에 워싱턴에서 말다툼끝에 때려눕혔고, Boswell을 술집에서 때려 20바늘을 꿰매게 해버린 사건도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구단주 Calvin Griffith와도 사이가 좋질 못했다.   

1971년 디트로이트 감독에 취임하여 지구 4위에서 1위까지 올려놓았고, 1973년 해임후 텍사스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는 전년도 105패를 당했던 팀을 지구 2위까지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1975년 8월에는 양키스의 지휘봉을 맡으면서 2차례의 월드시리즈 우승 등 양키스의 전성기를 다시 한번 가져왔다.

미네소타에 이어 다른 팀에서의 감독생활도 순탄하지만은 못했다. 텍사스시절에는 더블헤더 두경기에서 모두 퇴장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양키스시절에는 구단주 George Steinbrenner, Reggie Jackson과 시시콜콜 충돌했다.

특히, Jackson과의 충돌은 정도가 심했다. 1977년 거금을 들여 영입된 Jackson을 Martin은 개막전에서 5번타자로 기용하였다. 줄곧 4번타자로 활약한 Jackson은 물론 구단주의 마음까지 상하게 한 것이다. 시즌 초반 팀성적이 좋지 못하자, 6월 18일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Fenway에서 열린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6회말 우익수 Jackson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외야플라이를 뛰는둥 마는둥 하여 안타를 내줬고, 그에 이은 송구도 느리게 해서 타자를 2루까지 보내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에 격분한 Martin은 그를 바로 교체시켰다. 순간, Jackson은 덕아웃으로 들어가 Matrin감독과 욕설을 퍼부으며 으르렁거렸고, 당시 중계하던 NBC TV에 그 화면이 잡히기까지 하였다.

둘의 대결은 이듬해에도 이어졌다. 1978년 KC 로얄스와의 경기에서 Martin은 Jackson에게 번트를 지시했다. Jackson은 번트 동작을 취했지만 볼이 들어오자 방망이를 뺐다. KC 내야진이 전진 수비를 펼치자 Martin은 번트 사인을 취소했다. 그러나 Jackson은 이를 무시하고 다음 공 세 개에 모두 번트를 댔다. Martin감독에 대한 일종의 항명시위였고, 번트 3개가 모두 파울이었다. 이 사건으로 Jackson은 다섯 경기 출장정지라는 구단자체 징계를 받았다.

1979년 시즌도중 감독직에서 해고된 뒤 오클랜드를 거치며 그의 감독생활은 계속되었다.
1983년 팀성적부진에 발을 동동 구르던 Steinbrenner 구단주는 다시 Martin을 감독으로 불렀고, 항상 마찰을 빚엇던 구단주는 그를 감독에 임명했다가도 짜르기를 4차례나 반복했다. 항상 아쉬울때마다 그를 찾곤했다. 팀이 위기에 봉착하면 항상 그를 불렀고 팀이 정비됐다 싶으면 다시 내쫓았다. 성적이 곤두박칠 친 팀은 항상 Martin를 필요로 했고 그는 언제나처럼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다시 버려졌다. 그의 반대세력은 단장을 추근대고, 단장은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차갑디차가운 성격과 무뚝뚝함에 선수들이 동화되지않을까 조마조마 했고 다시 그를 짜르기 마련이었다.

Martin이 각팀에서 기록한 재임기간과 성적을 정리해보면..
미네소타에서 7위----> 1위
디트로이트에서 4위---> 1위
텍사스에서 꼴찌--->2위
양키스에서 5차례 재직동안 3년 연속 1위로
오클랜드에서 꼴찌--->2위로


그는 천재적인 용병술을 발휘했다. 어떤식으로 게임을 치르건 특유의 냉철함으로 승리를 낚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그만큼 알뜰히 활용한 감독은 없었다. 그를 따라다녔던 그의 반대세력은 그를 정착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항상 그의 꼬투리를 잡았다. 중간계투진이 허약하여 선수영입을 단장에게 요청하면 돈이 없다고 핀잔을 들었고, 허약한 중간계투진이 허약하여 선발투수진을 무리시키면 몰상삭한 감독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1990년 또 한번 양키즈가 Martin을 부를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던 198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그는 뉴욕주 북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날 그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살아남은 그 친구가 운전했다는 얘기가 있었고 그렇지 않다는 얘기도 있었다. 과연 누가 핸들을 잡았는지는 Martin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시 언론은 그의 잘못된 음주 습관을 꼬집는 기사를 즉각 발표했고 그의 작은 잘못에 대한 혹독한 댓가를 죽어서도 치르게했다.

우리 주위를 조용히 살펴볼라치면 역마살이 낀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간에 조용히 한곳에 정착하여 살 운명이 못된다. 실제로 Billy Martin은 12년간 5개 구단을 떠돌아 다니며 감독생활을 했다. 그가 실력이 없어서라고 말한다면 그건 어불성설이 된다. 그는 항상 하위권에 맴돌던 팀을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렸으니까. 실제로 감독의능력, 아니 팀성적을 상승시키는 능력만 따지고 보면 메이저리그 100년 역사에 그만한 감독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구단주와 항상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양키스는 1986년 영구결번(#1)시켜 Martin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감독을 맡은 팀은 항상 가시적인 성적 상승을 했다. 마치 마약성 진통제와같이 효과는 명백히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진통제와는 다르게 중독성이 없었다. 많은 단장들이 그가 훌륭한 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해임시켯다. 그는 항상 무뚝뚝했고 계산적이었다. 선수들과 많은 단장들은 그를 팀성적을 올리는 기계..그이상 그이하로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무슨이유에서인지 반(反)세력들이 많았다. 대외적으로 '말썽꾼'이라는 인상을 남긴 것은 자업자득인 면도 있었으나 항상 그는 남이 했던 잘못까지 뒤집어쓰는 신세였으니. 그는 항상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입장이었고, 외로운 비주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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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의 강속구 투수 J.R Richard가 쓰러지다.
로얄스의 골든글러브 2루수 Frank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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