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07 13:47:18, Hit : 72, Vote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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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마일의 강속구 투수 J.R Richard가 쓰러지다.




링컨 고등학교 시절 1년 내내 점수를 단 한차례도 내주지 않았을 정도로 J.R Richard의 공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이너시절부터 100mph을 넘겼던 그의 공은 메이저 입성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비공식기록이긴 하지만 최고 103mph을 찍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93mph을 상회하는 슬라이더까지 겸비하여 1970년중반 이후부터 그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터프를 자랑하는 투수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전성기는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데뷔 이후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던 1980년 7월 30일 연습경기 도중 마운드에서 쓰러지고 만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그해 시즌초부터 제기되었던 Richard의 마약복용설, 팀동료 Nolan Ryan에 대한 질투심 등의 온갖 좋지 않은 루머는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올스타전 등판 이후 통증을 호소했던 그의
말은 사실이였고, 병원으로 실려간 직후의 상황은 오른쪽 어깨에 피를 공급하던 동맥이 완전히 막혀 생명까지 위협을 받은 상태였다.

성경책을 매일 읽을 정도로 신앙이 깊었던 그는 1969년 드래프트 전체 1라운드 2순위로 휴스턴에 입단하게 된다. 2미터 3cm의 거대한 신장으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농구와 야구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미국 전역의 유수한 대학으로부터 농구장학생으로 최고의 대접을 보장받기도 했지만, Richard는 야구를 선택하였다.

1971년 9월 5일 샌프란시스코와의 빅리그 데뷔전에서 불같은 광속구로 다저스의 Karl Spooner이 가지고 있던 메이저리그 데뷔전 최다탈삼진인 15탈삼진과  타이기록를 달성하며 화려한 출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 과거에도 그랬던것처럼 강속구 투수의 딜레마인 제구력에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1이닝에 한개의 볼넷을 내줄 정도로 그의 제구는 거친 야생마와 같았다. 제구력 문제로 인해 좀처럼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들락날락하고 있던 Richard는 자신이 흑인이기때문에 빅리그 진입이 어려운 것이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입단후 5년간 막강한 스터프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던 그에게 1975년부터 기회가 찾아왔다.
팀내 최고의 강속구를 자랑하며 2차례의 노히트와 한경기 18탈삼진으로 이 부문 프랜차이즈 기록을 가지고 있던 Don Wilson이 갑작스럽게 자살을 해버렸고, 구단에서도 리빌딩작업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선발로테이션에 합류하게 된것이다.

이해 휴스턴은 64승 97패로 팀 역대 최저승률을 기록했으나, Richard는 12승으로 팀내 선발투수 중 유일하게 5할 승률을 넘겨 자신의 진가를 조금씩 발휘하였다. 제구력에서 여전히 문제점이 있긴 해도 그의 강속구와 슬라이더에 리그의 타자들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거의 매시즌 1할대의 피안타율을 유지함으로써 언히터블의 면모를 보였다.

이듬해 1976년에는 일취월장하여 20승 달성과 함께 팀내 에이스로 성장하였다. 피칭에 눈을 뜨게 되자 1977년부터 79년까지 3년 연속 18승으로 사이영상 수상도 시간문제로만 보였다. 특히, 1978년에는 내셔널리그 우완투수로 처음으로 한시즌 300탈삼진에 도달했고, 이듬해까지 2년 연속 +300탈삼진을 기록하며 타자들을 압도하였다.

당시 그와 상대를 한 일부 타자들은 제대로 제구가 안된 공에 맞는 것이 두려워 타석에 들어서는 것을 종종 꺼려 했다고도 한다. 한경기 6개의 폭투를 범할 정도였으니 만약 Richard의 컨디션이 안 좋을때에는 상대팀의 선수들은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4년 연속 +100볼넷 허용과 3차례의 리그 최다볼넷을 차지했을만큼 데뷔이후 계속해서 제구력에 문제점을 노출했으나, 1979년 처음으로 볼넷허용이 두자리로 내려갔고 평균자책점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록하여 리그 탈삼진과 평균자책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러한 상승세는 1980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3경기 연속 완봉승과 1점대의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며 데뷔 이후 최고의 한해를 보내고 있었다. 100만$ 연봉의 시대를 연 새로운 팀 동료 Nolan Ryan의 입단에 불만을 가지고 스프링캠프에서부터 불성실한 모습을 보여 많은 우려를 자아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성적에 힘입어 팀역시 창단후 최고의 시즌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6월 17일 컵스와의 경기직후 팔에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하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당시 팀관계자들은 그같은 행동이 Ryan보다 적은 85만$의 연봉을 받는 Richard가 불만을 드러내는 것으로 단정지었다. 시즌초부터 어깨, 등부위에 통증을 간간히 호소했던 선수가 최고의 피칭을 보여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였기에 구단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시각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단과 팬들의 생각과 달리 그의 팔에는 실제 문제가 있었다.
다저스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등판 직후에는 '나의 팔이 맛이 갔다' 고 다시 한번 불만을 토로했고, 7월 14일 경기에서는 포수의 사인을 제대로 보질 못했다. 계속해서 통증과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밝히자 구단에서도 일단 검사를 하기로 했다. 첫 검진에서 신체의 문제점을 찾지 못했고 팀 닥터는 Richard의 문제점이 정신적일 것이라고 의견을 내기도 했다. 1주 후에 의사들은 Richard의 오른쪽 어깨 근처 순환계의 손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구단 측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발표했다. Richard는 위험한 상태가 아니었고, 수술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7월 30일 Richard는 애스트로돔에서 트레이너 Doc Ewell의 관전하에 동료인 Wilbur Howard와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덕아웃에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연습을 더 하기위해 필드로 나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휴스턴 감리교 병원에서의 긴급 수술이 이뤄졌다. 오른쪽 어깨에 피를 공급하던 동맥이 완전히 막혀 졸도했을 때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였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졸도했을 때 몸의 왼쪽 부분은 거의 마비가 되었다. 두번째 수술로 그는 언어구사 능력과 몸의 힘은 대부분 되찾았으나, 그라운드 복귀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잠시 현역 복귀를 했었으나, 1984년 3월 트리플 A에서 6번의 선발 등판에 0승 2패, 평균자책점 13.68을 기록하는 부진을 보였다. 팀은 결국 그를 방출했다.

은퇴이후 이혼, 사기 등을 당하며 어려운 삶을 살았던 그는 후에 교회 목사로 새롭게 출발하여 무주택자들을 위한 주택사업을 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그러한 불행이 일어나지 않고 휴스턴에서 계속해서 선수생활을 했더라면 사이영상 수상은 물론이거니와 300탈삼진 경력이 있는 Ryan, Mke Scott과 함께 엄청난 탈삼진 행진을 벌였을 지도 모른다. 한 팀에서 세명의 선발투수가 300탈삼진을 기록한다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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