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07 16:41:04, Hit : 66, Vote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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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hn과 브레이브스의 원투펀치를 이룬 Johnny Sain




마운드위에서 막강한 원-투펀치의 역사를 따져보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1880년대 NY Gothams(現 자이언츠)의 선발투수들이였던 Tim Keefe와 Mickey Welch를 시작으로 1960년대 그 유명한 다저스의 Koufax-Drysdale를 거쳐 2000년대 애리조나의 Johnosn-Schillng등이 그 계보를 이어왔다. 이들을 빼더라도 140년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그 시대를 휘어잡은 많은 선발 원투펀치가 있었으니 그중 한 팀이 바로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약 5년간 보스턴 브레이브스 마운드의 핵심이었던 좌완 Warren Spahn과 우완 Johnny Sain이였다.

Spahn보다 4살 위였던 Sain은 1942년 24살의 나이에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되지만, 신인시절에는 선발이 아닌 불펜 투수가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였다. 1년간의 빅리그 생활을 마치고 2차세계대전의 확전으로로 군대에서 3년간의 시간을 보내고 복귀한 1946년, 이미 그의 나이 28세였고 당시 선수들의 평균 선수연령을 본다면 은퇴를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Sain은 이해 20승 14패, 평균자책점 2.21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에이스다운 피칭이였으며 팀성적부진으로 승률에서 약간 좋지 않았을뿐 다승과 방어율에서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일궈낸 카디널스의 Howie Pollet(21승, 방어율2.10)와 치열한 경쟁을 한끝에 리그 2위의 성적을 찍어낸 것이다.

이듬해인 1947년에는 올스타 선정과 함께 21승을 올려 똑같이 21승을 기록한 Spahn과 함께 팀의 86승 중 42승을 합작해내며 본격적으로 원-투펀치를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두명의 활약 덕분에 팀은 1914년 '미라클 브레이브스' 신화창조 이후 리그 최약체라는 이미지를 벗고 서서히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고, 1948년 마침내 91승으로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전년도 원투펀치의 활약을 직접 보았던 브레이브스 팬들은 'Spahn and Sain and then pray for rain'라는 구호를 연일 외쳐대며 이 둘의 위력이 시즌내내 지속되기를 기원했다. Spahn과 Sain이 등판하고 나서 비가 이틀동안 내려 경기가 없을 경우 다른 투수가 등판할 필요없이 이틀간 휴식을 취한 원-투펀치가 재가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운드에 이 2명의 투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이였다.

이러한 팬들의 바람하에서 Spahn이 15승 12패로 다소 부진하였지만, Sain은 팀의 1선발답게 리그에서 유일하게 3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1948년 24승으로 리그 다승왕을, 리그 MVP경쟁에서는 Stan Musial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며 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빛나는 기여를 하였다. 만약 사이영상 제도가 있었더라면 그의 수상은 100%였을 것이다.

젊은 감독 Lou Boudreau가 이끄는 클리블랜드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 홈경기에 선발등판한 Sain은 Bob Feller와의 대결에서 완봉승으로 기선을 제압, 정규시즌에서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나갔지만, 2차전에서 Spahn의 조기강판, 그리고 3차전에서도 팀의 3선발이 패배함으로써 힘든 일정을 소화하게 된다.

이틀밖에 쉬지 못한 상태에서 Sain은 81,997명이라는 엄청난 관중이 들어찬 원정경기에서 9회까지 2실점 완투했으나, 브레이브스가 1득점에 그치면서 패전투수가 되었고 팬들의 월드시리즈에 대한 우승염원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06으로 양팀의 선발투수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팀의 패배는 그에게 적지 않은 실망이 있어서였는지 이듬해 10승 17패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다소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950년 커리어 4번째 +20승 시즌으로 21승의 Spahn과 예전처럼 여전히 팀승수의 50%를 차지하며 원투펀치의 위력을 계속해서 유지, 군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이후 5년간 팀의 총승수 416승 중
Sain(95승)과 Spahn(86승)이 174승
을 합작하여, 당시 클리블랜드의 Bob Feller-Bob Lemon 원투펀치와 함께 당대 최강의 선발듀오라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브레이브스의 듀오는 1951년을 시즌 중반을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했다.
Sain이 시즌 중반까지 5승 13패라는 데뷔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자, 그를 양키스에 팔아버린 것이다. 8월부터 양키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얼떨결에 월드시리즈 우승의 일원이 된 Sain은 이듬해에는 몇차례의 선발등판과 함께 신인시절의 경험을 살려 다시 경기를 마무리 하는 불펜투수로 전향하게 된다.

양키스의 4년 연속 우승신화의 주역이 되었고, 1953년에도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14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브레이브스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한 월드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3차례나 누리게 된다. 36살의 나이였던 1954년에도 불펜투수로서 리그 최다인 22세이브의 개인성적과 함께 베테랑 투수로서 Whitey Ford 등의 젊은 투수들을 상대로 투수코치의 역할까지 소화했고, 실제로 은퇴후에는 1960년대 초반 양키스의 투수코치로서 4인 로테이션의 막강한 선발진의 위용을 만들어냈다.

캔사스시티 A's를 마지막으로 37살의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한 후 양키스, 미네소타, 디트로이트, 에인절스, 화이트삭스 등 여러 팀의 투수코치로 활동하면서 가르치는 팀마다 20승 투수를 한두명 배출시켜 최고의 투수코치라는 찬사까지 들었다.

선수들의 멘탈을 이례적으로 중시한 Sain은 매경기 투수들의 심리상태를 파악하여 투수들이 마운드에서 집중하게끔 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다고 한다. 메이저리그 11년 통산 139승 116패의 아주 뛰어난 성적은 아니지만, 브레이브스 팬들에게는 최고의 선발투수 중 한명으로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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