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classic(2017-03-09 21:49:51, Hit : 69, Vote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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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1루 수비, Keith Hernandez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10여년간 내셔널리그의 1루수들은 골든글러브 수상을 그냥 포기해야만 했다. 역대 최고의 1루 수비라는 극찬까지 받은 Keith Hernandez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 11년 연속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그의 별명은 'First base- Hero'였다.

전통적인 1루수의 기준을 놓고 봤을때 파워는 부족한 편이였지만, 중요한 득점찬스 상황에서는 그 어떤 선수보다 강한 이가 바로 Keith였으며, 세인트루이스와 뉴욕 메츠에서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한 스타 플레이어였다.

베네주엘라계 미국인이였던 그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Stan Musial과 해군에서 운영중인 야구팀에서 같이 활약을 했고 마이너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내야수 출신 야구선수였다. 본인은 메이저리그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인 Keith에 대한 기대는 상당히 컸고, 어릴적부터 내야 수비 훈련을 혹독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유소년기부터 받아온 훈련 덕분에 Keith의 수비는 남들보다 한단계 위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틈이 날때마다 고향팀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경기를 보여주기 위해 Candlestick Park에 어린 Keith를 데려갔고, Keith는 당시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 Juan Marichal과 메이저리그의 슈퍼스타였던 Mickey Mantle을 존경하며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1971년 드래프트 42라운드로 카디널스에 입단할 정도로 학창시절 타자로서는 그렇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4년부터였다.
카디널스의 트리플A 감독이자 카디널스의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였던 Ken Boyer로부터 조련을 받으면서 1974년 트리플A에서 타격왕을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이해 8월 30일 팀의 주전 1루수 Joe Torre가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루었다.

데뷔 이후 첫 2년간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 마이너리그를 오가며 평범한 성적을 올릴 뿐이였다. 벤치멤버로 있던 그에게 주전 기회가 온 것은 1976년 시즌 중반 Reggie Smith가 다저스로 트레이드 되면서 부터였다. Joe Torre에 이어 카디널스의 1루를 맡은 Reggie Smith는 고향인 LA로 가길 원하고 있었고 팀에 공개적으로 트레이드를 요구하였다.

은퇴를 준비하고 있던 팀의 간판 Lou Brock의 조언과 그 누구보다 Ketih를 아꼈던 스승 Ken Boyer의 조련으로 Keith는 붙박이 주전 1루수로 시즌을 소화한 1977년 타율.291, 15홈런, 91타점으로 급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978년 타격슬럼프속에서 주춤하기도 했지만, Ken Boyer가 팀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1979년 11홈런, 105타점의 성적과 함께 득점(116), 타율(.344), 2루타 48개, 출루율 리그 1위를 차지하며 피츠버그의 Willie Stargell과 함께 리그 MVP를 공동 수상하였다. 그리고, Steve Garvey로부터 뺏어왔던 리그 골든글러브 역시 계속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Keith 개인의 성적과 달리 팀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결국, Ken Boyer는 2년만에 지휘봉을 내려놔야 했고, 캔사스시티 로얄스를 강팀으로 만들어놓은 Whitey Herzog가 1981년부터 팀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Herzog는 Keith를 그리 탐탁치 않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비난을 했고, 코카인 복용이 의심스럽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자신과 소위 코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였을까?

Herzog와 3년간 함께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Keith는 1982년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하게 되고 1983년 시즌 중반 결국엔 메츠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다. 2명의 불펜투수를 내주고 Keith를 받은 메츠의 입장에서 최고의 선수거래였다. 메츠가 내준 Neil Allen 등 2명의 젊은 투수는 카디널스에서 그다지 꽃을 피우지 못했던 반면, Keith는 1984년부터 Dwight Gooden, Darryl Strawberry로 대표되는 젊은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로서 팀의 공격력을 이끌었다.

한편, 자신의 약물복용설에 대해 Keith는 Herzog감독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까지 제기했고, 이 기간동안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일부 선수들의 코카인 복용에 대한 실사를 시작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Keith였지만, 1985년 9월 피츠버그 법원에서 약물복용은 사실로 드러났고, Keith를 비롯한 일부 혐의가 인정된 선수들은 연봉 10%의 삭감조치를 당하게 된다. Keith의 야구인생에 오점을 남긴 것이다.

팬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젊은 팀 메츠의 리더로서 Keith는 20개가 넘는 홈런을 기록한 시즌이 단 한차례도 없었음에도 거의 매년 90타점 내외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찬스에 유난히 강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1985년 시즌에 그 단적인 예가 기록으로 나타났다.

Keith는 이해 91타점을 기록했는데 이중 24타점이 끝내기 승리 타점이였다(그의 통산 1,071타점 중 약 10%에 해당하는 129타점이 끝내기였다고 한다. Keith의 끝내기 타점기록은 단일시즌(24타점), 통산(129타점) 모두 메이저리그 기록이다.

1985년에는 몬트리올에서 동갑내기인 Gary Carter까지 오면서 팀은 또 한명의 리더를 갖게 되고, 젊은 투수진들의 활약에 힘입어 뉴욕 메츠는 강팀으로 변모하게 된다. Bill Buckner의 알까기로 유명한 1986년 월드시리즈에서 Keith는 7차전에서 3타점을 기록하며 팀승리를 견인하게 되고, 카디널스 시절의 월드시리즈 성적을 모두 합해 월드시리즈 14경기에서 13타점을 올려 기회에 강한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식 하향세로 접어들었지만, 베테랑다운 노련미로 원하는 공이 들어오지 않을때는 집요하게 상대투수들의 공을 커트시킴으로써 투수들을 괴롭혔고, 자신의 전매특허이기도 했던 3루 라인을 따라가는 번트로 상대 수비를 혼란스럽게 했다.
대체적으로 1루수는 파워히터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반면 Keith는 부족한 파워대신 선행주자를 한 베이스씩 진루시키는 팀플레이로 팀공격에 기여하였다.

1루수 부문 통산 어시스트 1위, 1루수 부문 한시즌 리그 최다 더블플레이 6회, 리그 최다 어시스트 6회 등 역대 최고의 1루 수비수라는 찬사답게 수비는 계속해서 최고로 평가받았고,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3-6-3의 병살플레이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후 무릎을 포함한 여러 부위의 부상으로 FA신분으로 클리블랜드로 팀을 옮겼고 1990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Keith는 은퇴 이후 NBC 방송의 인기 시트콤 'Seinfeld'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메츠의 TV 해설가로 활약하면서 야구저서('Pure Baseball : Pitch by Pitch for the Advanced Fan)'를 출간하기도 했다.

스프링캠프에도 매년 찾아가 타격 인스트럭터와 수비에 관한 많은 조언을 해주고 있다.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인 그는 금연운동을 비롯한 각종 건강관련 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17년간의 선수생활동안 통산 162개의 홈런에 그쳤다는 점에서 알수 있듯이 1루수로서 파워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계속해서 받아온 가운데 Steve Garvey, Don Mattingly와 함께 1970,80년대 메이저리그 최고의 1루수로 평가를 받았으나, 명예의 전당 헌액투표에서는 많은 팬들의 바람과 달리 희망적인 결과는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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